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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윤섭 Nov 30. 2018

직장인의 여행법_#6

12월의 보라카이(a.k.a 100%의 휴식처) <1편>    

내방 한쪽 벽에는 커다란 세계지도가 붙어있다. 여행하고 싶은 도시가 생길 때마다, 지도위에 포스트잇으로 써서 붙여두곤 한다. 아빠가 어릴 때 가르쳐준 일명 '바라봄의 법칙'에 따라, 뭔가 하고 싶은 게 생길 때마다 손으로 꾹꾹 눌러써서 눈에 잘 보이는 곳에 붙이는 버릇이 있다. 신기하게도, 글로 쓴 건 대부분 이뤄지곤 했다. 속으로 생각만 하는 것보다, 글로 쓰면 현실이 될 가능성이 확실히 높아진다. 온 우주의 기운이 작용한 건 물론 아니것 같고, 눈에 보이는만큼 의지가 강해져서 그럴달까.


유난히도 추웠던 그해 겨울. 서울은 냉동창고 상태로 영하 10도를 웃도는 날씨였고, 겨울에 태어났지만 겨울에 가장 적응 못하는 나는, 날씨 스트레스에 일 스트레스에 가슴이 답답한 나날을 소화하고 있었다. (겨울에는 같은 일을 해도 2배로 많이 하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지 않은가) 특히, 지은 지 족히 30년쯤 되는 주택건물이라 그런지, 내 집은 여름엔 덥고 겨울엔 유난히 추웠다. 그때, 무심코 벽에 붙은 세계지도를 봤는데, '12월에 보라카이 가기' 라고 큼지막하게 써있는 보라색 포스트잇이 눈에 들어왔다. 여름부터 붙어있던 포스트잇이 이제야 제 몫을 수행할 때가 온 것이다.


'아,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한 팀에서 일하는 PD와 모종의 합의를 거친 뒤, 보라카이행을 결심했다.  (여기서 모종의 합의란, 내가 휴가를 가는 동안 네 일을 대신 해줄테니 당신도 그렇게 하시라는 거였다.) 날짜는 정해졌다. 바로 3일뒤! 늘 그렇듯 급여행이다.


12월 보라카이 화이트비치 클라스


그런데, 보라카이는 혼자 가기에 좀 번잡스러운 코스였다. 비행기를 타고, 차를 타고, 배를 타고, 또 작은 툭툭이를 타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화이트비치에 도달할 수 있었다. 급여행인 처지에 그런 코스를 예약할 여유 따위 없었다. 이럴 때 쓰는 치트기, 바로 패키지여행 상품이다. 돈만 입금하면 비행기며 숙소, 액티비티는 물론 기타 모든 코스를 직접 예약하는 수고로움을 한방에 해결할 수 있다. (단, 패키지 여행 상품을 고를 땐, 자유시간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선택할 것! 안 그러면 극기훈련으로 끝나 휴가를 망칠 수가 있다.)


동남아 여행 필수 준비물

캐리어 안에 한여름 옷, 수영복, 스노클 장비까지 다 때려넣고 나면 여행 준비 끝! 이대로 인천공항만 가면 자동으로 보라카이 화이트비치에 무사 안착할 수 있다. 패키지 여행의 매력이 여기서 빛을 발했다.  일단 여느 동남아와 달리 보라카이 패키지가 좋은 건, 쇼핑 강매 타임이 없다는 것! 워낙에 좁은 지역이라 패키지 특유의 빡센 일정도 없다. 패키지지만 어슬렁 어슬렁 여유로운 스케줄로 여행을 즐길 수 있는 게 특징이다.


12월의 보라카이는 매력 포인트가 상당하다. 서울에서는 롱패딩도 춥지만 여기는 다 벗고 다녀도 좋을만큼 따뜻하다는 것! 이 조건 하나만으로도 아주 맘에 들었다. 일단 첫날에는 동네 탐방을 했다. 어디에 내가 쉴만한 보금자리가 있는지, 일종의 아지트를 찾아다녔다. 혼자만의 휴식을 위해 갔던 터라, 책도 읽고 메모도 끄적일 공간이 필요했다. 이 작업은 어딜 여행가도 항상 하는 나만의 여행 법칙이다.


뜨거운 보라카이 해변의 뜨거운 카페라떼

여행지에서 찾은 나만의 아지트 조건

1. 따뜻한 라떼나 맥주가 있을 것

2.책을 읽을 정도의 조도를 갖출 것

3.자연을 바라볼 수 있는 뚫린 뷰가 있을 것


여기에도 역시 ’그곳’이 있었다. 3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곳이 말이다. 해질녁 카페 sensi는 최고의 휴식처가 됐다. 사방이 뚫린 오픈형 구조에, 머그컵 가득 따뜻한 라떼가 맛이 좋았고, 잔잔한 팝이 흘렀고, 눈앞에 펼쳐진 화이트비치 뷰는 환상이었다. (보라카이는 끈적이는 더위가 아니기 때문에 그늘만 있으면 따뜻한 라떼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아, 해가 질때까지 여행가방에 챙겨간 <연금술사>를 읽었다.


‘아, 이게 휴식이구나’


노을이 예술인 보라카이 화이트비치
밤이 되면 맥주 한병하기 좋은 비치 펍(pub)

어느새 사방에 어둠이 내린 시간. 이럴 땐 음료 종류를 바꿔줘야 한다. 어디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카페 바로 앞에 노천 펍(pub)이 지천에 널려있다. 화이트비치에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쿠션을 깔고 앉아 엣지있게 맥주 한병만 시킨다. 책을 읽을 수 있는 조명은 물론 아니다. 이때는 책을 덮고 이어폰을 귀에 꽂는다. 너무 재밌어서 조금씩 아껴듯는 팟캐스트를 듣기도 하고, 그동안 못 들었던 음악도 몰아 듣는다. 뭐 이런 데가 있나 싶을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다. 서울에서 직장생활하며 쌓였던 체기가 한번에 내려간다.  

여기를 발견했다는 사실 만으로도 보라카이 여행은 목적을 제대로 달성한 거나 다름없다. 일단, 무지막지한 추위로부터 벗어났고, 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서울에서는 전혀할 수 없는 휴식을 만들고 있다. 일하면서도 매일 마시는 라떼와 맥주였지만, 보라카이로 공간 이동을 한 후 마시는 라떼와 맥주는 그 자체로 신세계다. 단순히 입만 즐거운 게 아니라 오감이 만족스럽다. 사소한 듯 하지만 완전히 다른 세계를 만나게 되는 이 묘한 기분, 이래서 여행이 또 다시 여행을 부르나보다. (그날의 기억으로 나는 오늘 하루를 또 버티고 있다. 이게 바로 직장인 여행자의 숙명)


‘그나저나, 내일은 또 어떤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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