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 영어 시험은 잘 봤어?
아들 : 응, 150 단어 이상 써야 했는데 나는 500 단어 넘게 썼어! 근데 오늘 영어 시험 주제가 뭐였는지 알아? '나에게 영감을 주는 사람'에 대해 쓰라는 거였어.
나 : 오~ 그래서 넌 누구에 대해서 썼어?
아들 : 할아버지에 대해 썼지!
나 :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어떤 면에 대해?
아들 : 할아버지는 엄청 활동적이시고 새로운 것에 관심도 많으시고 늘 그걸 배우고 싶어 하시잖아. 할아버지 책상에 가면 컴퓨터 관련해 배우신 것들을 기록해 놓은 두꺼운 노트가 있거든. 근데 얼마나 꼼꼼하게 적혀있는지 몰라! 나는 할아버지만큼 공부 열심히 하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어.
(80대 중반인 시아버님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실뿐더러 무엇보다 배움에 대한 열의가 뛰어난 분이다. 그간 다양한 '배움'의 대상이 있었으나 꾸준한 것은 동영상 편집, 사진 편집 같은 컴퓨터 에디팅 기술. 2주에 한 번 시댁에 갈 때마다 늘 컴퓨터 앞에 앉아 뭔가 작업을 하고 계신 아버님은 아들아이가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당신 방으로 불러서는 2주일간 쌓였던 '컴퓨터 관련' 질문을 쏟아내시곤 한다. 그때마다 시어머니는 "아이고, 또 할아버지에게 붙잡혔네"라고 못마땅한 반응을 보이곤 하시는데, 아들아이는 그런 할아버지의 열의에 친절하게 설명해주곤 한다. 그것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할아버지의 불타는 호기심과 학구열을 늘 흥미로워하며 '대단하다'고 말해왔던 아이였으니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보고 할아버지를 떠올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터.)
나 : 그랬구나. 할아버지가 알면 정말 기뻐하시겠는걸? 그런데 시험 주제가 너무 흥미롭다. 너는 주제 보자마자 할아버지에 대해 써야겠다고 생각한 거야?
아들 : 처음엔 엄마 아빠 중에 한 사람에 대해 쓸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F가 부모님에 대해 써도 되는지 질문하는 걸 보고, 겹치지 않게 할아버지를 택했지!
나 : 아, 그래? 만약 엄마, 아빠에 대해 썼다면 어떤 점에 대해 쓰고 싶었는데?
아들 : 아빠는 정신력이 굉장히 강한 사람이고 성실하다는 것? 그리고 엄마는 어릴 때 힘들게 살면서 학원 한 번도 못 갔지만 혼자 열심히 공부하면서 잘 성장했다는 것? 아마 그런 면에 대해 썼을 것 같아. 근데 결과적으로 할아버지에 대해 쓰기를 참 잘한 것 같아. 스토리 측면에서 할아버지 내용이 정말 풍부하거든!
'아이는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혹은 '아이는 나중에 나중에 나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게 될까?', '엄마라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 설명할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많다. 그리고 그 생각들은 늘 더 잘 살아야겠다는, 더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지곤 했다.
영어 시험에 대한 대화 끝에 나는 또 한 번 삶의 방식과 태도에 대해 생각했다. 동시에 내 삶에 늘 많은 영감(그리고 '글감'까지!)을 주는 아이라는 존재에 대해서도.
** 커버 사진_©어나더씽킹랩 via Dalle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