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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플로우지니 Jun 18. 2024

혜원이와 낭만마녀

오브아저씨와 바람개비(Missing May-Cynthia Rylant)


 매주 수요일 오후, 아이들이 북적이는 기린놀이터에 낭만마녀가 있다. 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던 아이,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오던 아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던 서, 너 명의 아이들 무리가 멈춰서는 곳, 낭만마녀가 펼쳐 놓은 노란색 돗자리 앞이다. 오늘 낭만마녀가 준비해 온 그림책은 인기 만점 오싹오싹 시리즈. 

"어, 나 집에 이 책 있어요! 이거 엄청 재미있어요."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한 아이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고서 크게 말했다. 제법 덩치가 큰 아이의 어깨가 으쓱 올라간다. 한 편, 아까부터 한쪽에 서서 그림책 표지와 낭만 마녀를 힐끔 거리는 아이의 작은 두 발이 머뭇거린다. 낭만마녀가 아이를 향해 손짓했다. 덩치 큰 아이가 그림책을 덥석 집어 들려고 하자 쭈뼛거리던 아이가 어느새 재빠른 발걸음으로 낭만마녀 옆에 붙어 앉았다. 올망졸망 여섯 명이 돗자리 위에 둘러앉았다. 둥그렇게 모여 한 사람씩 차례대로 소리 내어 <오싹오싹 팬티>를 읽기 시작한다. 9살 언니, 형들 사이 4살, 5살 꼬마들이 자신들의 동그란 무릎에 작고 통통한 두 손을 얹고 그림책을 향해 고개를 쭉 뻗는다. 낭만마녀는 아이들을 바라본다. 뛰어노느라 발갛게 익은 두 볼이 사랑스럽다. 아이들의 깨끗한 눈들이 반짝인다. 낭만마녀가 낭독을 이어간다. 그림책 귀퉁이를 붙잡은 손가락 사이로 바람 한 줄기가 살포시 스친다.  


 혜원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검은색 마녀 모자를 벗어 챙겨갔던 돗자리와 함께 신발장 옆 캐비닛 속에 넣었다. 낭만마녀는 4년 전, 코로나가 세상을 덮쳤을 때 온라인 활동을 위해 만들어낸 혜원의 닉네임, 혹은 부캐다. 혜원은 일상이 지칠 때면 낭만이 고팠다. 아니, 완전히 지쳐버릴 때를 대비해 틈틈이 낭만을 모으는데 애를 썼다. 혜원이 마음속 허기를 채우는 재료가 낭만임을 알데 되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꼭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혜원이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도대체 낭만 따위가 무엇인지, 혜원이 한 단어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혜원에게 낭만이란 그림책에서 만나는 그림 한쪽으로 충분할 때도 있었고 우연히 마주한 단어 하나에 마음이 묶여버린 채 기꺼이 여러 날을 헤매게 하는 그 정도도 설명할 수 있었다. 또 하나, 마음에 드는 글귀들이 가득한 책을 한 줄, 한 줄 소리 내어 읽는 행위, 낭독은 혜원에게 언제나 효과 좋은 신경안정제가 되어 주었다. 혜원은 스스로 해낼 수 없는 말들을 낭독을 통해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것에 가장 큰 만족을 얻었다. 때로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단어 조각들을 동그라미로 건져내고 그것들을 잇기 좋아했다. 단어가 의미로 연결되는 길에 자신의 느낌을 만나고 그 속에 담긴 욕구를 발견해 내기도 했다. 느낌말과 욕구말들을 모아 커다란 냄비에 부어 넣고 낭독마녀의 마법 스틱으로 휘휘 저으면 결국 사랑만 남는 수프가 만들어졌다. 신경을 안정시키고 마음속에 사랑이 퐁퐁 솟아나는 낭독마녀표 사랑수프.


 혜원은 만나는 사람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단어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분류하는 버릇이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의 상태를 솔직하게 표현하거나 혜원의 의견이나 느낌을 물어봐 주는 질문은 '기린'상자로, 질문은커녕 함부로 단정 짓고 비난하는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는 혀들은 '자칼'상자에 분류해 넣었다. 혜원이 사랑수프를 먹을 때마다 마음속에 새 공간들이 생겨났다. 혜원은 그곳에 앉아 자칼이 먹다 뱉은 썩은 고기를 가만히 관찰하는 여유도 가졌다. 혜원이 만난 자칼들은 혜원의 말을 중간에 잘라버리거나 대화의 물꼬를 자기 방식대로 틀어버리거나 혹은 과거의 일을 자신만의 해석으로 상대를 비난하는데 용이하게 갖다 붙이는데 능했다. 무엇보다 불편한 감정이 차올라서 폭발할 때 눈앞에 있는 이를 순식간에 감정쓰레기통으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뛰어났다. 


 Narcicist. 이 단어가 혜원의 삶에 심상치 않게 다가온 건 2020년의 한가운데쯤 아주 우연한 때였다.  2017년 9월 이후 혜원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던 '미해결과제'를 다시 펼쳐보기 위해 유튜브 알고리즘을 헤매고 다니다 멈춰 선 곳에서 이 단어를 만났다. '가스라이팅'이라던지 '나르시시스트'와 같은 제목을 단 영상을 보며 그동안 자신이 겪은 일들과 너무나 비슷한 사례들을 마주해야 했다. 그때마다 날파리(비문증)가 혜원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날아다녔고 뒷 목부터 날개 죽지 뼈 아래까지 찌릿한 느낌과 함께 단단하게 굳어버렸다. 혜원은 이미 '나르시시스트'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에 깊숙이 들어와 버렸고 자신이 누리는 것들에 감사하기보다는 원망스러움이 마음 구석자리에 움틀 때마다 죄책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혜원은 자신을 지켜줄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곳저곳에서 단어들을 주워 모으고 그 단어들을 엉거주춤 쌓아 올려 겨우 벽을 만들었다. 하지만 어두운 그림자는 코웃음을 치며 그 벽을 우습게 타고 넘었다. 


 오늘 혜원이 고른 그림책은 백희나 작가의 <장수탕선녀님>이다. 혜원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뮤지컬 <장수탕선녀님>을 본 날을 떠올렸다. 백희나 작가의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 선녀 할머니가 장수탕에서 살게 된 이유를 듣다 보면 자연스레 '선녀와 나무꾼'의 선녀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나면 전혀 다른 선녀를 마주한다. 500년간 장수탕에 사는 선녀할머니. 이 세상 유일한 이야기를 가진! 6살 아이, 주인공 덕지는 선녀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어!! 그거 제가 아는 이야기 같은데.. 그래도 끝까지 들어볼래요!"라고 말한다. 곧이어 혜원의 두 눈에서 왈칵 눈물이 터지게 되는데, 가만히 이야기를 다 들어준 덕지에게 건네는 장수탕선녀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다. 고맙다. 덕지야."  

곧이어 장수탕선녀가 덕지를 등에 태우고 바닷속 깊은 곳을 잠수하듯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무대 장치에 매달린 두 사람이 공중을 날고 밝고 활기찬 음악소리가 무대를 가득 채울 때쯤, 혜원은 두 볼이 흠뻑 젖을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꺼억거리는 소리가 새나가지 않도록 입을 막아야 했다.

'그랬구나...' 그 순간 혜원의 마음속에서 울리는 한 마디였다. 그동안 혜원이 그토록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었던 말이었는데 혜원에게 그 말을 해 준건 다름 아닌 혜원 자기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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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 seen plenty of whirligigs, but never any like Ob's. Ob was an artist -  I could tell that the minute I saw them - though artist isn't the word I could have used back then, so young. None of Ob's whirligigs were farm animals or cartoon characters. They were The Mysteries. 

                                                                                 ('Missing May' Part one- Still as night)


 <그리운 메이아줌마>에서 바람개비는 오브 아저씨의 유일한 자기표현 수단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린 서머의 눈에 아저씨가 만드는 바람개비는 그동안 봐온 것과 다른 예술작품이다. 하지만 메이아줌마를 떠나보낸 후 오브 아저씨는 더 이상 바람개비를 만들지 않는다. 메이 아줌마가 떠나버린 빈자리를 채울 수는 없지만 다행히 아저씨 곁에는 서머와 클리터스가 있다. 이 세 사람은 각자의 방식대로 메이 아줌마를 잃은 슬픔을 함께 한다. 감각적이고 신중한 침묵을 아는 클리터스 덕분일까. 정해진 방식에서 벗어나 온전하게 애도의 시간을 건너온 끝에 드디어 오브 아저씨가 다시 힘을 낸다. 세 사람은 트레일러 안에 있던 바람개비를 트레일러 밖의 밭으로 옮긴다. 그곳은 메이 아줌마가 사랑으로 가꾸고 돌보던, 그녀가 마지막으로 숨 쉬던 밭이다. 이제 세상 밖으로 나온 바람개비들은 불어오는 바람을 기꺼이 맞이할 일만 남았다. 메이 아줌마의 영혼을 담은 눈부시게 새하얀 '메이' 바람개비가 자유로이 나부끼는 것을 바라보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After breakfast Ob said, "I got us all a chore this morning." And within munutes we were carrying whirligigs out the door. We used May's tomato stakes and other bits of board we could find and we filled up May's empty garden with Dreams and Thunderstorms and Fire and that bright white Spirit that was May herself. 

...

Ob and I smiled at each other. And then a big wind came and set everything free. 

                                                                 ('Missing May' Part two- Set free )

 

 혜원은 2주에 걸쳐 <Missing May> 낭독을 끝냈다. 길지 않은 이야기지만 문장들 사이로 이름 모를 감정이 치솟을 때마다 몇 번이고 쉬었다가 낭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혜원이 따스한 바람에 흩날리는 '메이' 바람개비를 상상하자 얼어붙은 마음 한구석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날개뼈의 찌릿함을 거쳐 뒷목을 타고 올라온 뜨거운 물이 혜원의 두 눈으로 흘러내렸다. 오브 아저씨에게 바람개비가 있다면 혜원에게는 낭독마녀가 있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모두 집을 나가면 혜원은 산책을 나선다. 85도 물에 얼그레이차를 우려내고 레몬즙을 짜 넣은 텀블러와 낭독할 책을 챙기는 것은 혜원이에게 하루를 시작하는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촘촘한 나뭇잎 사이를 뚫고 나오는 아침 햇살 속 산책 길에  들리는 새소리가 혜원의 기분을 산뜻하게 해 주었다. 혜원은  마샬 로젠버그의 <비폭력대화>를 나무 가지 사이에 펼쳐 세워두고 스마트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혜원은 깊은 호흡을 한 번 들이쉬고 내쉬었다. 그리고 낭독을 시작했다. 혜원은 녹음 파일을 들으며 마음 한 구석에 밀어 둔 '자칼' 상자를 꺼냈다. 독이 묻은 혀가 내뱉은 말들을 켜켜이 쌓아둔 '자칼' 상자. 혜원은 불어오는 바람 한 점에 '자칼' 상자 속에 갇혀 퀴퀴한 악취가 나는 말들을 하나씩 날려 보냈다. 이제 '자칼' 상자에 남은 것은 새소리와 6월의 따뜻한 바람이다. 혜원은 가벼워진 상자를 들고 산책 길을 걸어 내려간다.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낼까?' 혜원이 지나는 발걸음 뒤로 새 날에 대한 기대와 감사가 종종종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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