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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호 Mar 08. 2023

<의무론>

Marcus Tullius Cicero

의무론 :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 키케로 지음, 허승일 옮김, 서광사

  의무론은 로마 공화국의 콘술을 지내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에 맞섰던 키케로의 저작이다. 키케로의 <의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은 현대 사회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또한 그것이 가진 해결책 역시 현대 사회에 어느 정도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먼저 이전에 읽은 책인<국가>와 <의무론>을 비교해보자. 그 전에 두 책의 철학적 논의의 무게, 그리고 저자들의 직업을 고려해봤을 때 그 내용의 경중만을 가지고 두 책을 비교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대략 두 책을 비교해보면 <국가>의 주제는 정의에 대한 고찰이다. 그리고 그 수단으로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생각해 냈다. 그리고 플라톤은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지도자와 그의 가장 중요한 소양인 선의 이데아까지 연결하여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플라톤은 윤리학뿐 아니라 정치학, 교육학, 미학 등 수많은 분야를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반면 <의무론>은 윤리학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그것이 다루는 주제는 명료한데, 도덕적 선이란 무엇인가? 유익함이란 무엇인가?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이다. 직관적이면서도 매우 중요한 윤리적 문제들이고, 현대 사회에서도 매우 중요한 문제들이다.

  키케로가 이 주제를 통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간단하다.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불가분의 관계이고, 우리는 도덕적 선을 추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또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을 다룰 때도 마치 도덕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보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한다. 육체적 쾌락, 속임수, 남에게 해를 끼침으로써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는 당연히 악하고 유익하지도 않다. 반면 금전적으로 당장 나에게 손해가 있다 하더라도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고, 매사에 정직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것 등의 행위는 당연히 선하고 유익하다. 그런데 키케로는 이 내용을 이야기하면서 어느 정도의 논리성만 갖출 뿐 플라톤과 같이 변증법을 연쇄적으로 사용하여 그것이 자명하다고 증명하려 하지도 않고, 유비 추론을 통해서 납득 시키지도 않는다. 다만 당연한 사실을 이야기하고 그 ‘당연한 것’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과거의 참주들, 이외에 도덕적으로 선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비판하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을 찬양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 중 몇몇은 참주들이 비극적 결말을 맞고, 도덕적으로 선한 사람들이 결국에는 유익을 얻었다는 어찌 보면 뻔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역설한다.

  앞서 밝혔듯, 키케로가 주장한 내용은 어느 정도 논리성을 가지고 있으나 플라톤의 서술처럼 튼튼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이 진리인지 의문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공리에 다다를 정도로 자신의 주장을 분석하고 뒷받침했으나 키케로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주장한 메시지가 비합리적이고, 믿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윤리학은 양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한 것에 대한 논의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에 대해서는 단순히 인간의 양심만을 가지고 따질 수는 없지만 나는 그 전체적인 내용은 신뢰할 만하다고 평가한다.

  그렇다면 왜 키케로는 당연한 이야기를 역설했는가? 그것은 키케로가 생각했던 당연한 윤리를 국가 지도자들이 지키지 않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끝까지 로마 공화국을 지키려 한 사람이다. 그의 입장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등장은 참주의 등장이었다. 그는 과거 아테네, 스파르타의 멸망, 그리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룩한 대제국의 멸망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로 인해 로마 역시 멸망하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그들이 실제로 악행을 저지르고, 이것이 지도층과 일반 시민들에게도 악영향을 끼쳤기에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그들을 비판하고, 도덕적 선을 따르도록 역설했을 것이다.

  키케로의 말을 따라 도덕적 선을 추구하면 그것이 곧 올바른 사회로 이끌 수 있는가? 그것 역시 당연하다. 키케로는 도덕적 선을 최선의 가치를 넘어서 유일의 가치로 보았기에 국가가 도덕적 선을 따른다면 위대한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경험과 들은 이야기들을 살려서 왜 도덕적 선이 최고의 가치이고, 그것을 지도자와 시민들이 따르면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있는지를 설명했다.

  키케로의 주장은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가? 그것을 다루기 전에 의무론에서 그가 주장한 내용과 우리 사회의 자본주의를 자세히 비교 분석해보자. 키케로는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사유 재산을 인정하였다. 하지만 자본주의와는 반대로 합법적으로 돈을 벌 기회를 선취하고 그것을 통해 얻는 이득에 대해서 도덕적으로 선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곡물 1톤을 싣고 어떤 나라에 가서 팔려고 한다고 하자. 그리고 내가 가장 먼저 그 나라에 도달해서 곡물을 팔 수 있고, 다른 곡물 상인들은 나중에 그 나라에 도달한다고 가정하자. 또한 그 나라 사람들은 다른 곡물 상인들이 오는 것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이 왔을 때 추정되는 곡물의 가격보다 비싸게 팔아도 되는가? 이 과정에서 법에 저촉되는 일은 없다고 가정하자. 일반적인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는 문제없을 것이다. 내가 먼저 그 나라에 도달했고, 그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오거나 오지 않는다고 속이지 않았고 또 내가 왔을 당시의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맞춰 팔았기에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런데 키케로는 공동체의 이익을 우선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더 비싸게 파는 것은 나 자신의 이익을 탐한 것이고, 그것은 도덕적이지 않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에게 또 다른 곡물 상인들이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도 그들에게는 손해를 불러일으키므로 일종의 속임수나 다름없다고 이야기했다. 이처럼 키케로는 분명히 사유 재산의 중요성을 인정했으나, 그것보다 도덕적 선을 훨씬 더 강조했다. 또한 그는 도덕적으로 선하게 산다고 평가받는 것만큼이나 좋은 평판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재산의 정도에 따라 서열을 매기고, 그것이 행복에 직결된다고 믿는 현대 사회의 잘못된 가치관에 제대로 된 처방일 것이다. 

  이를 현대 사회에 조금 더 포괄적으로 접목해 보자. 현대 사회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의 세태를 보인다. 많은 사람이 돈을 버는 것 그 자체에만 혈안이 되어 있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키케로가 주장하는 당연한 도덕적 선과 유익이 그가 제국으로 변해가는 로마에서 보았던 것처럼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하지 않게 되어간다고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많은 사람이 찾는 것은 돈을 많이 버는 방법이지, 도덕적으로 선하게 사는 방법이 아니다. 또한 공동체의 선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칭찬하지만 한편으로는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반면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땀 흘려 노력하는 것에는 너나 할 것 없이 찬사를 보낸다. 요약하자면 현대 사회에서 최선의 가치는 도덕적 선이 아니다. 오직 물질적 가치가 최선의 것이 되었다. 게다가 그 과정에서의 공정성은 옵션이 되어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도덕적 선과 공동체의 이익을 위해서 공화정을 붕괴시킨 게 아니라,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 공화정을 붕괴시켰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모든 사람이 로마 멸망의 씨앗이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면에서 키케로가 지적한 당연한 윤리들은 현대 사회의 문제점에 대한 올바른 해법이다.

  키케로가 주장한 윤리의 진실성에 관해서 이야기해보자. 나는 <국가>를 읽고 나서 이야기했듯, 어떤 철학자의 윤리학과 그의 논리도 완벽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키케로가 주장한 도덕적 선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성경을 믿고 특히 그것에 나와 있는 구원의 내용을 진실로 믿고, 그 외의 철학자들의 윤리들은 분명 불완전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도덕적 선과 그 행위를 추구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는 그의 주장은 진리에 근거해 보았을 때 거짓이다. 다만 우리가 구원받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을 때 도덕적 선을 추구하고, 도덕적 선을 나타내는 행위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마음속에 예수님이 있고 나서 행하는 도덕적 선과 그 행위들은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키케로의 논의가 아예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이미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악행의 원인은 상당수가 자본주의의 심화로 인한 물질주의와 황금만능주의라 봐도 무방한데, 앞서 밝혔듯 키케로의 윤리학은 그것에 대한 적절한 처방을 내려주기 때문이다.

  이와는 별개로 키케로가 추구했던 로마 공화국에 대해서 조금 논의해 보겠다. 나는 로마가  제국 시절일 때 공화국보다 더 오래 지속되었고 더 찬란한 문명을 누렸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키케로의 주장과 같이 공화국 체제로 로마가 지속되었다면 로마는 더 명예롭고 위대한 국가로 남았겠다고 생각한다. 유럽사를 살펴보면 로마는 유럽사의 근원이라 보아도 될 정도로 중요한 국가이고, 유럽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나는 중세 시대와, 근대에는 시민 혁명이 있기 전까지 왕정이 유효했고 그것이 유지될 수 있던 것은 로마가 군주제를 채택한 것 때문이라 생각한다. 만약 키케로의 뜻대로 로마가 공화국으로 남았다면 유럽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적어도 많은 나라들이 공화국 체제를 유지하였을 것이고, 자유와 평등을 위한 혁명이 일어날 필요 없이 민주주의 체제가 일찍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다. 로마 공화국이 완벽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테네와 로마 모두 신분제가 있었고, 직업에 따른 귀천 차이도 분명히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공화제는 군주제에 비해 많은 사람에게 권력이 분배되어 있고 국가 시민들에게만큼은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더 중시되었다는 것을 보면 분명 로마 공화국 체제가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가는 데 있어서 군주제보다 나았으리라 생각한다. 여담으로 플라톤은 이상 국가를 주장하며 한 뛰어난 지도자가 그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과두제, 민주제는 그보다 못한 정치 체제라 하였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상 국가와 이상적인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에서 플라톤의 체제를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체제는 플라톤이 최악의 정치 체제라 주장한 참주제가 될 것이다. 현실적으로 이상 국가를 만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키케로가 끝까지 수호하려 했던 공화제는 분명 로마에 최선이었고 민주주의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은 분량이 많거나, <국가>에서처럼 심층적인 변증법이나 유비 추론도 없다. 그만큼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고전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이것들이 담고 있는 당연한 내용들은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잊고 살아갔던 도덕적 선과 윤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도와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진리를 담은 윤리학책은 아니다. 다만 현대 사회에서 물질적인 가치만 좇으며 살아가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가치들을 담고 있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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