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정호 Sep 04. 2023

<범주들>, <명제에 관하여>, <입문>

Aristotle, Porphyry / 주로 <명제에 관하여>에 대하여

  <범주들>, <명제에 관하여>, <입문>, 아리스토텔레스, 포르퓌리오스 저자, 김진성 번역, 그린비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은 기초적인 논리학을 다루고 있으므로 철학의 가장 기본 중의 기본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포르퓌리오스의 입문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오르가논 중 가장 기초에 놓이는 책 <범주들>에 관한 소개를 해 주기 때문에 역시 기초적이고 중요한 책이다. 포르퓌리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는 날카로운 분석력을 통해 우리 주변의 수많은 낱말과 명제들을 구분하고, 이들의 논리들을 설명하였다. 하지만 <범주들>과 <입문>은 개인적으로 읽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주는 예시나 역자의 주석을 잘 따라가기만 하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중 나는 먼저 <범주들>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실체에 관해 설명하면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논리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명제에 관하여>에서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던 13장을 살펴보고자 한다. 개인적으로 13장을 처음 읽었을 때는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고, 2~3번 읽으면서 겨우 맥락을 잡아가기 시작했으며 그 와중에도 오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5번을 넘게 읽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알 수 있었다. <명제에 관하여>에 나온 13장을 해설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그의 분석력과 논리에 대해 깊이 있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물론 이 해설도 완벽하지 않기에, 본 해설보다 더욱 깊고 구체적인 이해는 책을 통해 직접 얻길 바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가 설명하지 않은 세세한 논리들은 역주를 참조하였으며, 그런데도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은 내용들은 필자가 직접 생각한 논리를 썼다. 혹시 책과 맞지 않는 내용이나 논리적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지적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여러 저서들을 통해 플라톤의 철학을 비판하고, 자신의 철학을 그 위에 세운 바 있다. 이는 엄밀한 논리학은 아니나, 논리학의 기초가 되는 <범주론>에서도 드러난다. 플라톤은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실체가 아니고, 그것의 실체(이데아)는 그와 분리되어 있다는 이데아론을 펼쳤다. 그의 핵심 논리는 바로 사람마다 같은 것을 보고 다르게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 색깔, 아름다움, 좋음 등은 실체가 아니며, 따라서 실체는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개체는 실체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이를 간접적으로 반박한다. 그는 범주들과 개체를 구분하면서 으뜸 실체를 유(類), 또는 종(種)으로 두지 않고, 개체 그 자체로 본다. 유와 종은 우리 주변의 실체들을 카테고리화 하는 일종의 개념들로 받아들이면 된다. 유와 종은 개체에 대해 서술되거나, 개체 내에 존재하는 것이고 따라서 애초에 개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와 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개체가 가진 특징이 곧 우리가 생각하는 유와 종, 개념이며 개체 없이는 이들은 존재할 수 없으므로 개체가 곧 실체라는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논리 외에도 다양한 논리로 플라톤과 그의 이데아론을 비판했다. 하지만 우선 저 두 논리만을 두고 생각해보자.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개체들이 먼저 존재하고, 유와 종을 비롯한 우리가 생각하는 추상적 개념들은 개체들이 있었기에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같은 개체를 보고도 그것을 다른 유와 종, 추상적 개념들과 연관시키는가? 나는 개체가 가지고 있는 특징을 인간이 바라볼 때, 인간의 감각기관과 지성의 한계, 경험의 차이로 인해 서로 다르게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실체 자체는 그대로 있는데, 단지 인간 본연의 한계 때문에 이를 서로 다르게 받아들이는 것이지 또 다른 실체의 그림자로써 우리가 만나는 개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한 예시를 들면 다음과 같다. 테니스공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노란색이라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초록색이라고 한다. 또한 드레스 색깔에 관련된 논쟁도 유명하다. 그런데 이 논쟁들은 플라톤의 주장대로라면 저 개체들과는 떨어진 실체가 따로 있는데, 그 실체가 그림자져서 나온 개체가 바로 테니스공과 드레스이며 그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우리는 다르게 이것들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물론 논리상으로는 맞지만, 전자는 색깔 자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후자는 각자의 경험이 달라서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게 더 합당해 보인다. 

  또한 이데아론을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초록색을 보지 않아도 초록색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으므로 개념 자체는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그 개념 역시 개체에 의한 경험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 개체가 개념에 앞서며, 개체가 곧 실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것도 경험한 바 없는 어린아이가 하얀 빈 방으로 들어간다고 가정해보자. 그 어린아이가 그 방에서 10년, 20년, 100년을 넘게 생존한다고 해도 그는 절대로 ‘초록색’이라는 개념을 알 수 없을 것이다. 초록색을 지닌 실체를 본 적이 없고, 경험한 바 없기 때문이다. 주의할 것은 그 아이가 초록색이라는 ‘언어’를 모르는 것이 아닌, 아예 초록색 ‘자체’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 방을 무(無)의 세계까지 확장하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어떤 개체가 주어지지 않으면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꺼림칙한 점이 있다. 만약 지구와 우주가 사라져서 모든 개체가 없어진다 해도, 개념 자체는 남아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모든 별들이 소멸하여 암흑뿐인 우주가 된다 해도, 생존한 사람들은 빛과 밝음이라는 개념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까지는 경험에 의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이 모조리 죽는다면, 빛과 밝음이라는 개념은 사라지는 것인가? 많은 탐구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명제에 관하여> 13장에 대한 해설이다. <명제에 관하여>는 총 1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역자에 따르면 14번째 장인 문장의 반대성 문제는 이미 7장에서 다루어졌기에, 7장과 별도로 쓰였거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직접 썼는지 의심받고 있다. 따라서 13장이 <명제에 관하여>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확실히 쓴 장 중 가장 마지막 장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확신하는 편이다. 왜냐하면 그만큼 양이 많고, 가장 복잡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13장의 제목은 양상 명제의 논리적 도출 관계이다. 이 장에서는 12장에서 살펴보았던 양상 명제의 종류와 모순 대립을 바탕으로 양상 명제들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다룬다. 위 표는 양상 명제들이 어떻게 도출되는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출되는지는 책에 상세히 나와 있으나, 간단히 각 열의 논리들 간의 모순이 없음을 통해서도 명제들 간이 서로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각 열의 3행인 ...은 불가능하다/불가능하지 않다를 살펴보자. 각 행에 나와 있는 명제들은 좌우로 모순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I-3(임은 불가능하지 않다)은 II-1(임은 가능하지 않다), II-2(임은 허용되지 않는다)와 모순되며, II-3(임은 불가능하다)과도 모순이다. 반면에 각 열의 4행인 ...은 필연적이다/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에서는 좌우로 모순되지 않고, 대각선 방향으로 모순된다. 즉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와 IV-4(임은 필연적이다)가 모순되고,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와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가 모순된다. 이렇게 4행이 모순되는 양상이 3행과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첫째로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와 IV-4(임은 필연적이다)의 엇갈린 배치 때문인지를 간접적으로 묻는다. 만약 3행과 같은 방식으로 양상 명제가 전개된다면,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에는 ‘임은 필연적이다’가 와야 하고, IV-4(임은 필연적이다)에는 ‘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가 와야 한다. 즉 기존의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와 IV-4(임은 필연적이다)의 배치가 뒤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배치할 경우, 표 내에 모순이 발생한다. 실제로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 IV-4(임은 필연적이다)는 II, IV 열에서 ‘불가능하다’가 반대되는 방식으로, 같은 뜻을 가지는 ‘필연적이다’를 통해 다시 주어지는 방식으로 표에 주어졌다. 따라서 배치가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와 IV-4(임은 필연적이다)의 잘못된 배치 때문에 대각선 방향으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와 IV-4(임은 필연적이다)에 각각 모순되는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와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의 배치가 잘못된 것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아리스토텔레스는 IV-4(임은 필연적이다)이면 I-1(임은 가능하다)인지를 살핀다. 만약 I-1(임은 가능하다)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에 부정이고 모순되는 명제인 II-1(임은 가능하지 않다)이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IV-4(임은 필연적이다) -> II-1(임은 가능하지 않다) -> II-3(임은 불가능하다)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 하지만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가 성립한다 할지라도 이후 I-3(임은 불가능하지 않다) ->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라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 -> I-3(임은 불가능하지 않다)은 성립하는데, 이후 I-4가 따라오는 논리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즉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를 대체하여야 한다.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를 어떻게 대체할 것인가? I-1(임은 가능하다) ->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 또는 IV-4(임은 필연적이다)는 옳지 않다. 같은 것에 대해 I-1(임은 가능하다) 혹은 III-1(이지 않음은 가능하다)가 모두 딸릴 수 있으나, 그것에 대해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 혹은 IV-4(임은 필연적이다)가 따라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떤 대상이 ~임은 가능하지만, ~이지 않음이 가능하다면, ~임은 필연적이라거나 혹은 ~이지 않음이 필연적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를 대체할 것은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로 보이며,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와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의 위치를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앞서 살펴보았던 바와 같이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이고 IV-4(임은 필연적이다)는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에 모순이므로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와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가 위치를 바꾸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표의 구조에도 맞기 때문이다. 그리고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II-1(임은 가능하다) -> II-3(임은 불가능하다) &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에서, 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다)에 대해서 모순이기 때문에 II-1(임은 가능하다)에 대해서도 모순이다. 따라서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가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의 자리에 오는 것이 마찬가지로 논리적으로, 표의 구조상으로 맞다.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조금 더 직관적인 방식으로 그 이유를 설명하면, 어떤 대상이 I-1(임은 가능하다) 일 때, III-1(이지 않음은 가능하다)이 함께 딸릴 수 있다 하더라도,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는 이 대상에 위배되는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I-4(임은 필연적이지 않다)와 III-4(이지 않음은 필연적이지 않다)의 위치를 다시 바꾸어 표를 다시 만들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논리 전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가 정말 참인지를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자. 만약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이 아니라면, IV-4(임은 필연적이다) -> II-1(임은 가능하지 않다, I-1에 모순되는 술어)이 나와야 한다. 만약 II-1(임은 가능하지 않다)이 I-1(임은 가능하다)에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IV-4(임은 필연적이다) -> III-1(이지 않음은 가능하다)이 나와야 한다. 하지만 II-1도, III-1도 IV-4에 명백히 따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이 가능한지를 확정 지을 수는 없다. 어느 I-1(임은 가능하다)인 것은 ~일 수 있고, ~이지 않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임이 필연적인 것’이 ‘~이지 않음’이 허용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난제를 ‘가능하다’의 개념을 분석함으로써 해결한다. ‘가능하다’(어떤 능력이 있다)는 한 이름 다른 뜻인 것들이다. 어떤 것은 능력의 발휘 상태에 있으므로 능력이 있다고 알려진다. 예를 들어 걷고 있으므로 걷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또한 어떤 능력이 있다고 전해지는 사물들, 혹은 불변하는 것들의 경우는 마찬가지로 그런 능력의 발휘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어떤 능력이 있다고 전해진다. 반면 어떤 것은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어떤 능력이 있다고 말해진다. 예를 들어 걷게 될 것이기 때문에 걷는 능력이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변하는 경우의 것들에만 이것들이 존재한다. 이때 단적으로 IV-4(임은 필연적이다)를 만족시키는 것에 대해 I-1(임은 가능하다)에 대해서는 후자의 가능(능력)을 말하는 것은 옳지 않으나, 전자의 가능(능력)을 말하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단적으로 IV-4(임은 필연적이다)를 만족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지금 어떤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뜻에서 가능(능력)에만 들어맞지, 앞으로 능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뜻에서의 가능(능력)에는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IV-4(임은 필연적이다) -> I-1(임은 가능하다)의 논증은 양상 명제들을 재배치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나타내는지 명백히 밝힐 필요가 있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내용들의 예시를 들어 설명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내가 달리는 것이 필연적이라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달리고 있으며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②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내가 달리기 때문이다(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③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앞으로 내가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①과 ③의 관계는 모순이다. ③을 분석하면,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단지 앞으로 내가 달릴 수 있기(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 내가 지금, 혹은 어느 시점에 달리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설령 내가 필연적으로, 즉 영원히 달린다고 해서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달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지만, 기계 장치가 강제로 내 다리를 움직여서 내가 필연적으로 달리면 나는 달리는 것이 가능한가? ③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나는 달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가 필연적으로 달린다고 해서 달리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①⇏③). 반대로 내가 앞으로 달릴 수 있기(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나는 필연적으로 달리지 않는다. 내가 앞으로 달릴 수 있다(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내가 달리는 시점, 여부에는 아무런 관여를 하지 못한다. 쉽게 말해 내가 달릴 수도 있고, 달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내가 달리는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그것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필연적으로 달리지는 않는다(③⇏①). 반면 ①과 ②의 관계는 모순이 아니다. 내가 달리고 있는 것이 필연적이면 나는 언제나 달리고 있으므로 ②에 따라 나는 달리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앞의 예시를 다시 사용하면, 내가 달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없더라도 기계 장치가 내 다리를 움직여 필연적으로 달리게 한다면 ②에 따라 나는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①은 ②의 충분조건이다(①⇒②). 반대로 내가 달리고 있고, 그것 때문에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면 내가 달리는 것은 필연적일 수 있으나,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내가 달리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가능한 그 시점에 달린다는 것인데, 그것이 내가 언제, 어디서나 반드시 달린다는 사실을 보장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②⇏①). 결론적으로 위 논증에서 I-1(임은 가능하다)은 필요조건이고, IV-4(임은 필연적이다)는 충분조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개별자가 보편자에 따른다는 표현을 통해 IV-4(임은 필연적이다)가 I-1(임은 가능하다)의 충분조건임을 간접적으로 이야기한다. 즉 ~임이 필연적인 것은 ~임이 가능한 것에 든다. 물론 앞의 논증을 통해서, 모든 능력에 대해서 성립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필연성과 비 필연성은 다른 양상 표현의 토대로 보아, 다른 것들은 이에 따른다고 본다. 따라서 표를 다시 만들면 다음과 같다.

  3권의 책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어려운 장의 논증을 세밀하게 분석하고 해설해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내용을 최대한 풀어쓰고, 간단히 설명하고 넘어간 내용을 자세히 쓰고, 새로운 예시들도 썼지만, 여전히 어려운 부분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은 자신이 직접 저술한 것이 아닌, 강의록 식의 방식으로 많이 남아있어 논리가 엄밀할지언정 친절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를 따라가면서 그가 건너뛴 생각들을 숙고하고, 결론에 함께 도달하면서 그만큼 큰 지적 희열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2000년도 더 전의 사람이 이렇게 깊은 분석적 사고를 할 수 있었다는 데서 큰 놀라움을 느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 발달하지 않았다고 보기보다는 인간의 이성이 이렇게나 놀라운 일을 과거에도 할 수 있었으니, 미래에는 더더욱 많은 철학적 성취를 할 수 있음을 기대할 수 있었다. 또한 이 장을 분석하는 것은 플라톤의 <국가>를 분석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플라톤은 대화편으로 이루어져 주장과 반박이 명료하게 드러났고, 그 근거들도 잘 드러난 편이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본 저서는 대화편이 아니고, 논리가 명료할지언정 친절하지 않아서 더더욱 오랜 시간에 걸쳐 이해해야 했다. 하지만 덕분에 깊은 숙고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나름대로 만족하였다.

작가의 이전글 <정치학>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