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금도는 어디에 있는 섬이야?
꼬꼬마 시절에 아빠에게 물었던 질문이다. 아빠는 미취학 아동이었던 내게 자기 이름 정도는 한자로 쓸 줄 알아야 한다며 커다란 종이에 한자를 써주곤 했다. 한자라고는 어디선가 들어본 한 일, 두 이가 전부였던 내게 가로선과 세로선과 대각선을 조합해 만드는 복잡한 글자 뭉치는 어른의 상징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이제 막 한글을 배워가는 나이에 한자를 쓸 줄 안다는 건 또래에게 자랑하기 좋은 재주였다. 그렇게 '묘금도 유(劉)'를 소개받았다. 아리송했다. 묘금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나라 어딘가에는 묘금도라는 섬이 있어서 유 씨들이 모여 사는 것일까? 그러나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변을 받지는 못했다. 아빠는 뜻이 그럴 뿐이니 알고 있으면 되는 거라고 했다. 아직 아이가 알지 않아도 되는 단어구나 하고 수긍했다.
나이를 더 먹자 옥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이 손바닥만 한 크기에 얇은 종이가 가득한 한자 옥편은 혹여 내가 낙서하거나 찢어서 망가뜨릴까 봐 늘 책장 가장 높은 곳에 있었는데, 의자와 책을 쌓아 올려 팔을 쭉 뻗으면 뺄 수 있을 정도로 키가 자랐던 것이다. 그렇게 허락 없이 옥편을 읽다 가슴이 철렁했다. 내가 알고 있던 묘금도 유가 '죽일 유'로 소개되어 있었다. 묘금도는 어디에도 없었다. 조상님이 과거에 큰 잘못을 저질러서 성 씨에 죽인다는 뜻을 넣었구나, 그래서 옥편을 못 보게 했구나. 지레짐작했고 초등학교 내내 그런 줄로만 알았다. 한 번 잘못 인식한 사실은 제대로 된 정보를 접할 때까지 오해하기 마련이다.
지금은 '죽인다' 말고도 '베푼다', '이겨낸다', '예쁘다'라는 뜻도 가진 풍성한 글자라는 사실을 안다. 그럼에도 죽인다는 뜻이 좋지는 않기에 파자한 뒤 묘금도라고도 부른다는 사정도 읽어낸 지 오래이다. 파자는 글자를 깨뜨린다는 뜻으로 한자를 자획으로 풀어 나누는 일을 말한다. 과거에는 점술적 요소도 있었다지만 지금은 한자를 암기를 보조하거나 언어유희로 쓰인다는데…. 여염부라는 이름도 진짜 이름에 들어간 한자를 장난스럽게 파자하다 만들어졌다.* 아무리 복잡한 모양이어도 나누면 단순해진다. 나눈 한자의 뜻을 엮어서 나름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과정은 즐거웠고 더 오래 기억할 수 있게 도와 한자 자신감도 더해주었다.
천천히 좋아하는 것을 익힙니다
새로운 한자를 만나고 분해하는 일은 즐거웠지만, 친구와는 나눌 수 없었다. 다들 어디서 매일 한자 100개씩 외우는 고문이라도 받고 왔는지 모두가 한자를 싫어했다. 친구들과는 연예계 소식이나 케이블에서 본 애니메이션, 학교와 학원에서 일어났던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분명 그 수다는 즐거웠지만 휘발성이 엄청나서 다음 날이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어차피 영어 단어나 수학 공식 등 외워야 할 것들이 산더미여서 더 이상 기억할 여력이 없었다.
대신에 간간히 역사나 일본어 시간에 한자를 만나면 반갑고 애틋했다. 새로 만난 한자를 교과서 한쪽에 공들여 적고 또 어떤 단어에도 쓰이는지 찾아봤다. 이런 딴짓은 생각보다 공부할 때도 도움이 되었는데, 예를 들어 조선 세조 때 발생한 훈구파는 훈장의 훈과 같은 한자를 사용한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 어려움 없이 기억할 수 있었다. 반할 반(反)은 특히나 애용하는 한자였다. 영어에서 단어의 반대말을 표시하거나 무언가 척을 지는 상황을 나타낼 때 긴 서술어 대신 한자 하나를 적는 것으로 빠르게 정리할 수 있었다. 풀네임을 적기 귀찮았던 나라는 中(중국), 美(미국), 日(일본)과 같이 사용해 획 하나라도 덜 썼다. 손을 조금이라도 덜 움직여보려는 게으른 마음에서 비롯한 꼼수였다. 다만 이 꼼수가 늘 통했던 건 아니다. 기호처럼 사용한 先(선)과 後(후)는 한글보다 더 복잡하고 긴 손놀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쓰임이 좋은 점도 줄곧 한자를 선호하게 된 이유였다.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할 때도, 캘리그래피를 연습할 때도 한자는 오히려 단단한 받침이 되어 주었다. 며칠 전에는 올림픽 경기를 보다가 배구에 쓰인 한자를 찾아봤다. 밀칠 배(排)였는데, 배기가스에 사용된 한자와 같았다. 역사 용어인 배불숭유에도 들어갔는데, 더 찾아보니 일본어에서는 유사한 사건으로 배불훼석(排仏毀釈)이 있었다. 메이지 시기에 있었던 불교 배척운동이라니, 뜻밖에도 인식하지 못했던 옆 나라의 과거 이야기까지 알게 되었다. 한편, 대만에서 꼭 먹어봐야 하는 길거리 음식 중 하나로 꼽히는 지파이(鸡排)에도 배가 쓰인다. 여기서는 그냥 영어의 파이(pie)에 소리를 맞췄을 뿐이다.
한자가 가득한 대만 풍경
꾸준하지 않아도 괜찮아
배구에서 이상한 곳까지 튀어나가긴 했지만, 이렇게 한 번 꽂힌 한자를 중심으로 꼬리를 물어 나아가는 것이 내가 한자를 만나고 친구 먹는 방식이다. 그러니까 다르게 보자면, '각' 잡고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호기심이 밀려왔을 때 그 파도를 타고 짧은 순간 집중할 뿐이다.
이런 간헐적이고 내킬 때만 공부하는 방식이 삶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괜히 잡지식만 늘어나는 건 아닌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의외로 (법적인) 성인이 된 이후 쓸모가 보이기 시작했다. 적합한 어휘와 표현을 사용해 글을 다듬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더욱 그렇다. 예시로, 지금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미망인'은 망자, 더 정확하게는 남편을 따라 죽지 못했다는 뜻이다. 먼 과거에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입에 담으면 안 되는 표현이었고, 특정 성별이 다른 성별의 소유가 되지 않는 지금은 지양해야 할 단어인 셈이다. 그러나 오랜 세월 눈과 귀에 들어왔던 표현은 쉽게 걸러지지 않는다. 미망인이 어떤 한자인지 진작 살펴보지 않았다면 나 또한 무심코 써버리고 뒤늦게 부끄러워했을 테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는다. 바위를 뚫겠다는 불굴의 의지는 애초부터 없었지만, 재밌어서 한자 좀 갖고 놀아보겠다는데 구태여 말릴 사람은 없었다. 그렇게 긴 시간을 두고 축적된 한자 기억은 충분히 소화되어 뼈와 살이 된 지 오래라 더 복잡한 한자를 만나도 음을 유추하거나 뜻을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게 도왔고 한문을 읽어내야 하는 상황이 왔을 때도 어렵게 다가오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하는 한자를 뭉쳐내어, 소통할 수 있는 의미를 읽는 행위는 즐거웠다. 돌이켜 생각해봐도 강제된 공부가 아니어서 그토록 오래 한자를 좋아할 수 있었다. 시험을 위해, 자격증을 위해 정해진 분량을 완벽하게 익혀야 했다면 스트레스받는 건 둘째 치고서라도 진작 흥미가 식었을 테다. 앞으로도 한자를 본격적으로 배우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다.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게으르게, 그러나 신호가 왔을 때는 집중해서 한 자 한 자 만나갈 것이다.
그래서 궁금한 이야기: 당신의 이름에는 어떤 한자가 쓰였나요?
* 바르게 나누면 '여도이읍'이 맞다. 그러나 고구려 성 같은 느낌이 들어서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