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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염부 Feb 24. 2022

대체 오전 수업 어떻게 들었던 거지

긴장하지 마십셔... 학과 시험 합격하기

[8시 15분 ㅇㅇ아파트 정문에 도착합니다.]

기다리던 픽업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넓은 부지가 필요한 탓인지 학원 대부분은 대중교통으로는 가기 힘든 곳에 자리를 잡는 것 같습니다. D학원도 예외는 아니었죠. 아파트는 손바닥만 한 크기로 줄어 멀찍이 솟아 있고, 큰 철탑과 작은 전봇대가 수두룩한 곳. 주변은 조립식 회사 건물과 컨테이너로 둘러싸이고, 인도는 무성한 잡초로 뒤덮여서 아, 여기는 걷는 사람이 거의 없겠구나 싶은 입지였습니다. 저처럼 첫 면허를 따기 위해 운전 학원에 등록한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자차를 몰고 갈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수차례 왔다 갔다 데려다 주기도 머쓱한 나이죠. (우리나라에서는 만 18세부터 면허 취득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학원은 이렇게 수강생을 나르는 차량을 운영합니다. 여기까지 와 준단 말이야? 하고 놀랄 정도로 비교적 먼 곳까지요! 단, 집과 학원의 거리가 멀수록 이동시간이 길어질 수 있습니다. 1순위로 타고 이어서 다른 수강생을 차례로 차례로 태워가곤 하니까요.


학원 가는 길에 만나는 식물을 풍성하게 토핑한 인도. 이런 게 진정한 에코프렌들리 아닐까요?


그동안 저는 학원 연락을 기다리며 카드 일일 결제 한도를 확인하고 증명사진을 찍었습니다. 어차피 포토샵으로 다듬어 주실 테니 눈썹만 균형 맞춰 그리고 갔는데, 좌우대칭을 맞추고 목도 길어 보이게 수정해줘서 썩 만족스러웠습니다. 금손 사진사 님께 영광을-. 책도 샀습니다. 자동차 구조를 알려주는 책과 간단한 정비 방법을 알려주는 책, 이렇게 무려 두 권이나 말이죠. 중고로 구매했다지만, 모든 시험을 치르고 난 지금 돌이켜보면 투 머치 소비였습니다. 학과 시험 문제집도 아니고 구조와 정비에 대한 책을 사서 예습하다니요. 그 결과 엑셀과 브레이크의 위치는 몰라도 엔진의 사이클인 흡입-압축-팽창-배기 순서는 알고, 기어 옆에 적인 글자는 해석하지 못해도 자동변속기에 이상이 생기면 ATF부터 점검하라고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전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희박한 유형의 인간이 아닐까요?


여차저차 배우는 걸 좋아하는 편입니다. 책을 읽어서든 방송을 통해서든 수업을 통해서든, 지식을 얻기 위한 욕심이 평균보다는 높은 셈이죠. 덕분에 일종의 필기시험인 학과 시험도 큰 걱정은 없었습니다. 10년 전에도 3시간 수업 듣고 가뿐히 통과했는데, 하물며 지금은 더 잘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저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합격했습니다만, '합격' 두 글자를 볼 때까지 팔만 사천 번의 번뇌에 휩싸이는 일은 막을 수 없었습니다.


가장 큰 오산은 아직도 오전 수업을 멀쩡한 정신으로 들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만이었습니다. 맨 정신으로 오전 수업을 들었던 적이 까마득하군요. 어쩌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을 겁니다. 워낙 아침잠이 많고, 티가 안 나게 잘 조는 비법이 있어서 열심히 꾸벅거렸으니까요. 더군다나 출근을 안 하니까 무척이나 흥이 올라서 전날 잠도 늦게 잤습니다. 그 대가로 9시부터 3시간에 걸쳐 진행된 수업은 결과적으로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머릿속에 입력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정신 차리고 비치된 교재를 빠르게 훑어본 게 끝. 이러다 첫 관문인 학과시험을 재응시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죠. 대부분 합격하는 시험이라지만, 그런 시험에 떨어져버리면 너무 부끄러운걸요. 요즘엔 애플리케이션으로 문제 풀어볼 수 있다던데 해볼걸, 나는 왜 어제 늦게 잤을까, 아침에 커피라도 위장에 붓고 올걸...


야속하게도 서부면허시험장까지는 순식간이었습니다. 우르르 내려서 번호표를 뽑고, 신체검사를 받고 3층 시험장으로 가기까지 20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대형 병원을 연상시키는 3층 풍경은, 시험장 바로 옆이라서 적막했습니다. 다시 번호표를 뽑고 기다렸다가 전광판에 숫자가 뜨자 드디어 시험장 입실. 바로 앞에 단을 높게 올린 공간에 감독관들이 앉아서 신원을 확인하곤 시험 볼 자리를 알려주었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아크릴판까지 높게 세운지라 더욱 엄숙하덥디다.


시험은 컴퓨터로 진행했습니다. 한 자리씩 건너뛰어 앉고, 뒷사람이 엿보지 못하게 뒤로 반쯤 누운 모니터를 내려다보며 정답을 고릅니다. (책상에 파묻힌 모니터가 새삼 정겹습니다. 저학년 때 봤던 그런 컴퓨턴데 말입니다) 어떤 문제는 쉬웠고, 어떤 문제는 이게 답일 수도 있지 않나 의문이 생겼으며, 또 어떤 문제는 띄어쓰기가 잘못된 거 아닌가 싶어 한참 들여다보다가 남은 시간과 못 다 푼 문제 수에 치여 다시 집중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10년 전과는 달리 유독 법과 처벌에 대한 문제가 많이 나온다고 느꼈는데, 기분 탓일지도 모릅니다. 왜냐면 그런 문제는 죄다 정답을 알 수 없어 죄다 찍었거든요. 원래 풀지 못한 문제일수록 기억에 남는 법이죠. 그 사이에도 몇몇 사람이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 시험을 치르는 흐름이 이어졌습니다.


시험장 인원이 네댓 명쯤 바뀐 시점에 저는 마지막 문제를 풀고 미련 없이 제출했습니다. 어차피 아는 건 다 풀었으니까 운에 맡기는 수밖에요. 오 신이시여. 합격했다는 알림에 안도합니다. 오전 내내 자책했던 마음이 풀립니다. 학원으로 돌아가 기능 수업과 시험 스케줄을 뽑고 집에 돌아온 시간은 오후 5시. 평소보다 2시간은 이른 귀가지만 몸은 천근만근이더라고요. 앞으로 남은 두 개의 시험은 게으름 피우지 말아야겠다 싶은데,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감도 안 잡혀 더욱 막막합니다. 비싼 돈 내고 학원에 등록했는데 왜 불안은 가시지 않는 걸까요? 과연 무사히 운전면허증을 손에 넣을 수는 있을까요?


지갑을 열자 꼬깃해진 학원비 납부 영수증이 보입니다. 금액, xxx,xxx원. 염료와 산이 발린 감열지가 따뜻한 카드기를 통과하며 새긴 (정확하게는 섞어서 띄운) 숫자가 주는 압박이 꽤 큽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역시 나에게 주어진 이 길을 걸어가는 게 최선이겠죠.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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