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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향수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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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maflower Jun 04. 2020

자라 이모션스 컬렉션 에보니 우드

코로나에 지친 일상을 버틸 수 있는 선물같은 향


향수는 사치품이다. 사람들에게 향수가 사치품 이상이바라는 나 역시도, 향수를 뿌리는 잠깐의 순간이 엄청난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금전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몸이 아플 때 인간관계에 상처 입을 때, 회생활이 녹록지 않을 때... 우리의 일상은 여러 이유로 한 순간 무너지기 쉽고, 근근이 하루를 버티는 일 외의 모든 것은 분에 넘치는 사치가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모두가 고통받는 지금도 예외는 아다. 외출 자제와 자가 격리, 심지어 봉쇄령까지 내려진 상황에서 그 누가 여유롭게 향을 즐기는 사치를 만끽할 수 있을까. 이제는 모든 것이 예전과 같을 수 없음을 곱씹다 보면 우울과 무기력에 빠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그러던 지난달, 매우 흥미로운 일이 있었다. 5월 15일 자라 이모션스(ZARA Emotions) 향수 컬렉션이 국내 출시되자마자 품절 사태를 빚은 일이다.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반응이 뜨거웠다. 코로나 확산 위험에도 불구하고 매장에는 시향을 하려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라인은 재고가 들어오는 족족 다시 품절되기를 반복했다.

 

자라 이모션스 컬렉션 (이미지 출처: globalcosmeticsnes.com)


조 말론 브랜드를 설립한 조 말론 CBE 여사와의 콜라보레이션 덕분에 출시 이전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자라X조 말론, 줄여서 자말론이라고 불리는 이 컬렉션은 더욱이 40ml 29,000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순식간에 '가성비 끝판왕 향수'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 정도까지 열광할 일인지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컬렉션이 작년 겨울 해외에 먼저 출시된 이후 해외 블로그에서 심심치 않게  리뷰를 볼 수 있었는데 그다지 평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반적으로 쉽게 예상 가능한, 특별할 것 없는 향에 지속력도 보통 이하라고 했다. 누군가는 말했다. "20파운드를 주고 몸에서 그저 그런 향이 나길 원하신다면 한 번 구입해보세요."


당연히 기대감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무려 8종의 향수. 안 그래도 의욕이 없는데 여러 향을 한 번에 테스트한다는 생각만으로도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런데 모두들 제품을 못 구해서 안달이라고? 가격이 너무 저렴해서 다들 속는 셈 치고 사보는 것이 아닐까, 그래도 후기가 안 좋으면 이렇게 계속 품절 일리가 없는데 과연 향이 어떻길래... 이제는 인생 향수를 찾았다는 간증글까지 넘쳐나며 궁금증이 폭발한 나 역시 일단 사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우습게도 품절 대란 탓에 배송비를 만원이나 주고 해외 직구를 했다. 가장 먼저 품절이 되었다는 에보니 우드(Ebony Wood), 그리고 좋아하는 Tea note를 상상하며 워터릴리 티 드레스(WaterLily Tea Dress) 40ml를 주문했다. 해외 배송비까지 더 해도 7만원을 넘지 않는 가격. 이 돈을 주고 향수 두 병을 사본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어렵게 만난 자말론 향수는 기대 이상이었다. 가볍고 싱그러운 워터릴리 티 드레스도 좋았지만 반신반의했던 에보니 우드가 훨씬 좋았다.


기대치가 낮았기에 좋았다는 뜻이 아니다. 프루티, 스파이시 노트가 더해진 우디 향. 자칫 두통 유발로 선반 구석으로 밀려났을지도 모를 이 향은 딱 좋을 만큼의 개성으로 6월 날씨에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매력을 과시했다.


향은 싱그러운 그린 프루티 노트와 살짝 타는 듯한 우디 노트의 대비로 시작된다. 핑크 페퍼의 가볍고 깔끔한 스파이시 캐릭터 덕분에 너무 진하지 않은 달콤함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시간이 지날수록 무게감 있는 우디 노트 위로 부드럽고 따듯한 스파이스와 살짝 바닐릭한 머스크가 드리워지며 풍성하고 중독성 있는 향이 완성된다.


워터릴리 티 드레스, 아말피 선레이 등 몇 가지 향수를 더 시향고 나니, 해외 블로거들에겐 아쉬운 점도 많았으리라 이해가 다. 예쁘고 무난하고 모나지 않은 향. 당연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그들도 잠깐 잊고 있었던 거다. 향이 꼭 독창적이고 특별해야만 우리에게 영향력을 가지는 건 아니라는 것을. 그냥 좋은 걸 좋아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코로나 블루에 빠진 이들에게 이 가격으로 이 정도의 만족감과 행복을 선물할 수 있다니 이제는 기특할 지경이다.



이번 일을 통해 깨달았다. 코로나 때문이든 그 무엇 때문이든, 우울감이 일상 깊숙이 들어온 순간에라도 우리는 의지를 내어 향을 맡아보는 잠깐의 사치를 누려볼 필요가 있다. 


지금 내 기분은 어떤지, 내 기분에 어떤 향이 어울릴지, 오늘 그 향이 좋은지 싫은지 찬찬히 느끼며 결국 내가 누구인지 잊지 않기 위함이다.


나만 빼고 모두가 이미 알고 있었나 보다. 힘든 시간일수록 나를 위한 작은 사치는 일상을 버티게 하는 귀한 선물이 된다.



유난히 멍했던 오후, 바람결에 내 몸에 남은 달큰한 향이 코로 들어오고 둔 감각이 조심스럽게 깨어난다. 득 실감이 난다. 쨌든 오늘도 이렇게 숨을 쉬 살을.





자라 에보니 우드는 에보니 우드, 핑크 페퍼, 클로브 노트를 포함하고 있다. 40ml 29,000원 & 90ml 4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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