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수라고 했던가. 성인이 된 후로 가장 안 풀리는 한 해를 보내고 있다. 열정과 패기로 20대 중반까지 잘 버텼지만, 세상이 쉽지 않다는 것을 직시하면서 생각보다 강인하지 못했던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만큼의 보상을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허탈함이 밀려왔다. 이 전에는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라는 말로 최면을 걸었지만, 나이가 점점 들어가고 내가 그토록 멸시했던 남과의 비교를 하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초라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서서히 나를 갉아먹기에 이르렀다.
대학생 때 만나서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올해 우리 둘 다 어려운 일들을 겪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친구가 한 달 전에 해준 말이 있다. '야, 그동안 열심히 살았으니까 좀 쉬어라. 쉬다 보면은 이전에 못했던 생각도 하게 되고 마음이 조급해지지 않더라.' 그 친구는 한 달 동안 혼자 여행 다니고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박혀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한 달을 쉬었다. 안 보던 드라마도 보고, 테니스도 시작하고, 책도 읽고, 잠도 많이 잤다. 신기하게도 선물이 찾아왔다. 운이 좋게도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 '참 신기하네.'
내일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본가에 왔다. 그 친구가 본가 근처에 살아서 전화를 해봤다. 참 예전 같았으면 먼저 전화하는 일이 없던 나인데, 쉬는 동안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알고 주위 사람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것 역시 긍정적인 변화이다. 아쉽게도 친구는 강남에서 술을 마신다고 해서 주말에 보자고 했다. 통화를 하다 보니 어느새 근황 얘기를 하게 되었고, 너 말대로 좀 푹 쉬니까 일이 잘 풀리기 시작했다고 전해주었다. 친구가 수화기 너머로 해준 말에 순간 울컥했다. '야, 너 예전보다 목소리가 훨씬 편안해진 거 같다. 옛날에는 막 목소리에 떨림도 있고 자신감이 많이 떨어져 보였는데. 진짜 잘됐다. 요즘 일이 잘 풀리는 게 네가 그동안 잘 살아왔다는 거야. 고생 많았다. 다시 열심히 일해야지 우리.' 이런 친구가 있음에 감사했다.
최근에 친한 형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 형한테도 최근 잘 풀린 일에 대해서 얘기했다. 역시나 너무 잘됐다며 축하해 주었다. 내가 참으로 존경하고 좋아하는 형인데 이런 말을 해주었다. '네가 잘되면 시기 질투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리고 너한테서 빨대를 꽂으려는 사람들도 있을 거야. 하지만 멀찍이 떨어져서 축하해 주는 친구가 있다면 넌 복 받은 거다. 물론 나는 언제나 너를 축하해 줄 수 있다. 더 열심히 해라.' 친구랑 통화하다 보니 형이 해준 이 말이 생각났다.
인생은 여전히 어렵다. 사실 눈을 딱 감고 쉬운 길을 선택할 수도 있겠지만, 아마 내가 원하는 삶은 아니리라 생각한다. 지금 잘 풀린 일을 토대로 다시 인생을 설계해보고자 한다. 예전과 다른 마음가짐이라면, 이전에는 혼자 길을 걸어가고자 했지만, 이제는 주위 사람들과 함께 가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혼자 쉬면서 지극히 개인적이고 이기적이었던 지난날들을 반성했다. 세상은 같이 살아갈 때 비로소 아름다워 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