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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승한 May 04. 2019

미담은 언제까지 이 시대를 지탱할 수 있을까

어느 경찰관과 신고자의 이야기

  새벽 두 시에 20대 여성이 112 신고센터에 전화를 건다. 도어록 방전으로 문을 열 수 없으니 도와달라는 내용이다. 경찰은 사정은 딱하지만 긴급한 신고를 다루는 회선을 통해 도움을 줄 수 없는 사안이라고 판단하고 전화를 끊는다. 신고센터에서 받는 무수한 ‘부적절한’ 전화들 가운데 전혀 특별할 것 없는 한 통이다.


  이 이야기의 특별한 부분은 그다음에 이어진다. 전화를 끊고 10여분 뒤, 신고 전화를 받았던 경찰관이 신고자의 귀가가 걱정돼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여성이 울음을 터뜨린다. 당황한 경찰관이 왜 우냐고 묻자 그 이유가 ‘너무 고마워서’라고 대답한다. 경찰관은 휴대전화를 통해 검색한 도어록 방전 시 처치 요령을 스마트폰 메신저로 공유한다. 여성은 무사히 귀가한다.


출처: 파이낸셜 뉴스


  이야기가 너무 허술하다. 군데군데 살펴볼 구석들이 있다. 먼저, 스물아홉 살의 여성, 다시 말해 스마트폰과 인터넷 검색에 익숙한 세대의 성인이 잠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면 알 수 있는 해결법을 찾지 못해 긴급신고 전화를 걸었다. 도어록은 편리한 개폐장치인 동시에 기계다. 동력을 상실한 기계는 마치 바위처럼 단단하게 문을 잠근 채 단순한 폐쇄기로 전락했을 것이다.


  신고자는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을 떠올렸다. 그러나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어 있었다. 열쇠업체들을 검색하자 대부분 영업시간이 지났다. 24시간 업체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 무응답이 여성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켰다.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이 여성을 삽시간에 지배했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다급해졌다.


  늦은 시간이었으니 술을 마신 상태였을지도 모른다. 술을 마셨다면 판단력이 흐려졌을 것이다. 이 모든 불안과 불확실한 선택의 연속에서, 여성은 지인이나 가족에게 전화하는 수단은 고려치 않았다. 전화할 수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긴급신고 전화의 통화 내용에서 여성은 ‘이런 전화를 여기다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라는 말로 운을 뗀다. 여성은 그 전화의 부적절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 부적절성이 잠든 지인들에게 전화를 거는 것보다 약했을 뿐이다. 여성은 차악을 선택한 것이다.


  아마 여성은 배려심이 깊은 사람일 것이다. 그녀의 가족과 지인들도 야박한 사람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경찰에 신고를 할 정도로 무서웠으면서, 따뜻한 전화 한 통에 울음을 터뜨릴 만큼 선의에 목말라 있었으면서, 여성은 경찰이 아닌 누군가에게 전화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무언가 잘못돼 있는데, 그 지점이 어디인지 진단하기가 쉽지 않다.


  도어록의 모델을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도어록은 방전이 임박하기 전에 경고음을 울린다. 그리고 문을 여닫을 때마다 경고음이 울리는 상태로 꽤 오랫동안 작동한다. 문제의 그 도어록도 고장이 나지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어찌 됐든 여성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생업에 지쳐 집에 돌아오는 길과 덜 깬 잠을 달고 집을 나서는 순간 그 어느 곳에도 그 경고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주말에 외출을 위해 나서는 길, 그 시간은 그런 사소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소모하기엔 아까웠을지도 모른다. 경고를 듣고 고의로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여성이 부주의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신고 전화를 받은 경찰관은 여성이 느끼고 있는 다급함을 이해했다. 그래서 여성이 걱정됐고, 10분 뒤 확인 전화를 걸었다. 최초 신고 회선상의 통화에서도 궁금한 내용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지 못했다. 정말로 촌각을 다툴 만큼 위급한 신고가 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회선을 보존하기 위한 매뉴얼 때문이었을 것이다.


  경찰관의 대처와 사후조치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그러나 여성의 무사 귀가는 신고를 받은 경찰관 개인의 호의에 기인했다. 우리의 체계는 체계와 비체계 사이 어디쯤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 요청에 응할 수 없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관이 무심한 타입의 사람이거나 새벽 근무로 몹시 지쳐있는 상태였다면 여성은 문 앞에서 열쇠 업체가 전화를 받기까지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근처의 숙박업소나 찜질방에서 밤을 보내야 했을 수도 있다. 사실 바로 이 점이 이 이야기에 미담의 지위를 부여한다.


  이 이야기는 SNS에서 미담으로 이름난 뒤 언론에서 보도됐다. 사람들은 환호와 찬사를 보냈다. 뉴스는 특별한 것을 보도한다. 미담이 특별한 시대다. 살아가며 듣기에 충분한 미담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담은 안도의 정서를 전파한다. 자신들이 안전한 사회에 속해있다는 증거이자, 사람을 삶으로부터 유리시키는 동기들에 대한 반증이다. 과거에 일상이었던 부분들이 점점 비일상으로 바뀌고 있는 상황에서 미담의 카테고리는 점점 더 다층적으로 분화될 것이다. 미담이 지탱하는 시대다. 미담은 언제까지 이 시대를 지탱할 수 있을까.




2018.11.18.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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