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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서 Aug 15. 2021

전지적 두더지 시점

엄지공주_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그냥 두더지 씨라고 불러주시오.” 

“네, 두더지 씨. 반갑습니다. 최근에 어떤 여성에게 심한 모욕을 당하셨고, 그래서 그 여자를 고발하고 싶으시다고 하셨죠?”

“그렇소.”

“그 여성은 어디서 어떻게 만나셨나요?”

“결혼정보회사에서 소개를 받았소.”

“소개팅 장소에서 모욕을 받았다는 말씀이시군요. 불쾌하시겠지만, 다시 한번 구체적으로 상황을 설명하실 수 있을까요?”

“아하……,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납득이……, 내가 참 기가 막혀서, 아니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그냥 편하게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씀하시면 됩니다.”

“아, 알겠소. 그러니까, 지금부터 일주일 전이오.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내가 늘 이용하는 5성급 호텔 커피숍으로 나갔소. 잠시 내 얘기를 하자면, 나는 모 결혼정보회사의 노블레스 회원으로 수년간 활동을 하고 있다오. 그래서 매주 나랑 동급의 VVIP 회원을 소개받고 있죠. 내가 소개받은 상대를 말하자면 이런 식이요. 설국 기업 외손녀, 해양대 총장 친손녀, 성냥 업계 재벌 딸, 훈제오리업계의 딸 등 하나같이 기라성 같은 조건들이었죠.”

“재력이 막강하신 분들이군요.”

“당연한 거 아니요. 재력은 아주 소중하니까.”

“네 그렇습니다. 계속 말씀해 주시죠.”

“원래 소개팅이라는 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나갔다가, 역시나 하는 불쾌감으로 돌아오는 해프닝이라는 걸 알고 있소만, 이번엔 정말 달랐다는 거지요.”

“말씀 도중 죄송한데, 소개팅 나가실 때도 지금처럼 포마드를 그렇게 바르시나요?”

“물론이죠. 이건 제 트레이드 마크와 다름없으니까요. 하하.”

“네. 계속하시죠.”

“지난주에 나온 여자는 사실, 담당 커플매니저가 적극적으로 권했지만 내키지 않았소. 조건이 아주 별로였거든. 재력도, 학벌도, 직업도 이렇다 할 게 없는 데다, 신장이 평균을 넘지 못한다니 2세를 생각하는 내 입장에서 가당키나 했겠소? 내가 얼굴엔 까다롭진 않아도, 신체 조건은 좀 보거든. 여자가 좀 건장하고 키가 커야 한다고 누누이 말했건만, 어디서 코딱지 만 한 여자가 나타나서는, 닉네임도 딱 저같이 ‘엄지공주’라나 뭐라나…….”

“여러 가지로 조건이 마음이 들지 않은 여성이라 기분이 상하셨군요. 노블레스 회원이신데, 거절하시고 그냥 다른 분을 소개받지 그러셨어요?”

“사람 일이라는 게 그래서 희한하다는 거요, 마음에 내키진 않았지만, 마침 주말에 골프 약속도 캔슬되고, 심심하던 차에 그냥 나갔지요. 횟수에 포함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이죠. 그런데 그 엄지만 한 여자를 보자마자 이상하게 끌리지 뭐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기분이랄까. 이건 우리가 전생에 뭔가 인연이 있는 거라고 마음먹고, 바로 들이대고 여자에게 애프터를 하자고 마음먹었는데……,”

“그랬는데요?”

“아니, 그 여자는 나를 보자마자 이상한 기시감이 든다느니, 누구랑 닮아서 싫다느니 하며 5분도 되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지 뭡니까? 앉은 키나 선 키나 비슷한 주제에 말입니다. 들어봐요, 이게 이유가 되냐구요? 내 닉네임이 두더지인 게 불쾌하다니.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싫은 생명체가 세 개가 있는데, 그게 바로 두꺼비, 풍뎅이, 그리고 두더지라나요? 평생 두더지라는 닉네임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내게 할 소리입니까? 기가 막혀. 내가 누굽니까? 두더지 그룹의 장남이자, 이 업계의 일인자 아닙니까? 평균 신장도 미치지 못하는 여자를 불쌍히 여겨서 거둘 생각이었는데……. 이러니 내가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소?”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모욕이라기보다는 그냥 불쾌함이나 섭섭함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내가 좋다고 상대방도 나를 좋아하라는 법은 없으니까요.”

“노노!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아니, 나 두더지가 좋다는 데 그게 말이 되냔 말이오. 내가 거둬 준다는데? 엄지만 한 주제에 말이요.”

“사랑이나 결혼을 누가 누군가를 거둔다는 의미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요. 그 엄지공주라는 분과 두더지 씨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이라고 그냥 받아들이시면 어떨까요?”

“내가 왜? 지가 뭐라고 나한테 감히!!! 내가 왜 그런 엄지만 한 여자한테 능욕을 당해야 하는데!!!!!!! 헉헉.”

“진정하시고, 잠시 숨을 고르시죠.”

“다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아 그렇소.”

“그날 헤어지신 후로 다른 일은 없었나요?”

“너그러운 마음으로 문자와 톡을 보냈지요. 한 오백여 개쯤? 내가 가진 재력과 능력을 모두 솔직하게 알려주자 하고요.”

“그랬더니요?”

“기가 막혀. 핸폰 번호를 바꾸고, 결혼정보회사에서는 탈퇴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내가 누굽니까? 한번 하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반드시 하고 말 겁니다.” 

“하하. 두 사람이 인연을 맺는다는 건 상대방의 동의가 필요한 일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처음 오신 거니까, 여기까지 하도록 하죠.”

“아니, 벌써 시간이 다 된 거요?”

“네. 나가셔서 간호사에게 약 받으시고, 다음 상담 날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자, 다음 환자분 들어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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