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거의 아무 일정도 잡지 않고 각자 알아서 시간 보내기로 하고 혼자 바르셀로나 고딕지구를 돌아다니고 있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날들이다.
토요일이라선지 산타 마리아 성당 앞 작은 광장에 장이 섰다.
치즈. 강정 같은 옛날과자들 집에서 담근 와인 등을 내다 파는 장이다. 나는 여기로 들어오기 직전 츄러스를 사서 길거리 계단에 앉아 핫쵸코에 찍어 먹었던 터라 이 장구경은 그냥 의자에 앉아서 지켜본다.
스페인에서 거의 한 달이 지나가고 있다.
이제 이틀후면 떠난다. 파리에서 일주일 머물고 돌아갈 예정이다.
신시가지가 아닌 구시가지에 숙소를 정한 터라 밤이면 왠지 위험할 것 같고 피부가 어두운 청년들이 무리 지어 지나가면 더 움츠러든다. 어제 같은 금요일 밤이면 거리에 대마초 연기도 흘러 다닌다. 발코니로 향한 문단속을 단단히 했지만 1837년에 지어졌다는 건물의 낡은 문들은 헐겁기만 하다.
밤에 발코니에 나가서 거리를 내다보거나 또 아침 새소리에 나가보면 누군가의 귀갓길이거나 출근길 일하는 모습들이 보인다. 이곳이 누군가의 하루하루 손 때가 묻은 일상이라 느껴지면 그때부터 경계심이 없어지고 편해진다.
바르셀로나 근교 지로나라는 소도시를 오늘 여행할 계획이었으나 안 하기로 했다.
왕좌의 게임 촬영지고 중세의 모습이 그대로 남겨져있다니 멋있겠지. 그래 멋있을 거야.
하지만 그냥 늦잠 자고 그저 무용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스페인 여행 중 무수히 본 것이 오래된 건물과 마을이다.
바르셀로나 제일 복작거리는 이 고딕지구의 토요일을 무용하게 보내기로 한 것은 꽤 잘한 일 같다.
한 달 가까이를 같이 다니다가 오늘 묵직한 숙소문을 혼자 열고 나오는데 얼마나 공기가 상쾌하던지.
마른 남자 버스커가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엠프 없이 그냥 맨 소리로 노래한다.
이 와글거리는 광장에 노랫소리는 그저 구석에서 잠깐 들렸다가 사라진다.
그래도 어디서든 기타 소리가 들리면 그 사운드는 다른 소리들과 구별되어 들려온다.
스페인 와서 나는 기타의 제왕들을 숱하게 봤다. 그것도 거리에서ᆢ. 과연 스페인은 기타의 왕국이다.
플라멩코도 단연 기타 베이스 위에서 펼쳐지는 향연이다.
거리에서 플라멩코를 추는 사람들도 결코 백그라운드 음원을 틀고 하는 법이 없다. 반드시 기타리스트와 가수가 같이 있다. 기타와 노래와 춤이 같이 합을 맞춰서 이루어지는 것이 플라멩코이다. 화려한 옷과 현란한 몸짓, 리드미컬한 구둣박자에 현혹되어 춤이 다 인 것 같지만 춤은 음악 위에 떠 있는 한 부분일 뿐이다. 우리나라 창가락처럼 뱃속에서부터 끌어올리듯 불러대는 노래선율 또한 스페인이라는 나라의 켜켜이 쌓인 정서를 가늠케 해준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카탈루냐 음악당에서 훌라멩코 공연을 보면서 어떤 세월의 삶들이 저렇게 노래하게 하고 저렇게 춤을 추게 하였을까 궁금해졌다.
제대로 공부하진 못했지만 여행 다니며 단편적으로 본 역사로는 기독교 이슬람 아프리카 등등의 문화가 혼합되어 이루어져 있는 것 같다. 어디서든 순수보다는 혼합된 문화가 더 매력 있다.
알람브라 궁전을 보며 아 ᆢ그동안 본 서구의 궁전은 그저 화려하게 덕지덕지 화장한 여인네 같았구나 싶었다. 이슬람 건축은 정말 격조 있게 아름다웠다.
핸폰으로 이 글을 쓰는 사이 그늘이던 의자 위로 해가 많이 이동해 들어왔다. 무릎이 따뜻해서 좋다. 옆의자에 백인 젊은이가 앉아있다 머리를 길게 땋아 내린 흑인 아가씨가 앉아있다 여러 명이 앉았다 간다. 무릎을 좀 더 굽다가 나는 또 지도 없이 골목들을 어슬렁 거리련다.
사람 사는 곳은 모두 미로처럼 얽혀 가게로 가득하다.
사람들은 먹거나 사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하는 것 같다.
한 달짜리 여행도 기내 캐리어 하나로 다니는 나는 짐이 무서워 쇼핑을 못한다. 아주 작은 기념 마그넷이나 몇 개 살뿐이다.
스페인에서 먹는 즐거움 중 하나는 샹그리아다.
하루가 끝나가는 즈음 어디서든 샹그리아 한 잔 걸치고 숙소로 들어가면 하루가 곱게 마감되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