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키는 사탄의 인형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살아 움직이는 인형하면 대중들이 가장 먼저 떠올리는 캐릭터이다. 가장 유명한 호러 영화의 아이콘 중 하나이기도 하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그때는 국민학교라고 했었는데) <사탄의 인형> 비디오를 봤었다. 어느 날 아빠는 집에 비디오를 사주셨다. 지금의 아이들은 상상이 안 될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이 있었고, 그곳에서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안방을 컴컴히 해두고선 영화를 보는 일이란 우리의 최신 유행이자 낙이었다. 처키는 양아치 찰스 리 레이(Charles Lee Ray)의 영혼이 깃든 장난감 인형이다. 12명의 사람들을 살해한 망나니 연쇄살인범으로, 동료 깡패와 함께 마이크 형사에게 쫓기던 중 동료의 배신으로 내팽개쳐져 총을 맞고 죽어가다가 사망하기 직전 지인에게 배운 사악한 부두 주술을 사용해 근처에 있던 '착한 아이(Good Guy)' 인형에 빙의한 이후로 계속해서 인형으로 살며 사람들을 죽이기 시작한다. 본명보다 더 알려진 '처키(Chucky)'라는 이름은 그가 인간이었을 적 주변친구들이 사용하던 애칭이다.
어릴 적 본 그 처키인형의 이미지는 내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어 인형에 대한 두려움이 무의식에 담겨진 것 같다. 동물 인형은 귀엽지만 사람 인형은 머리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그런데 어느 수업 시간, 처키가 나타났다! 그날이 되기 전까지 인영(가명)이는 정말 온순하고 모범적인 아이였다. 엄마도 상담시에 둘째를 많이 걱정했고, 둘째 은영(가명)이를 등록하며 인영까지 함께 등록한 터였다.
사실, 이 아이들과의 만남은 어쩌면 운명같은 거였다. 학원을 확장하며 인테리어를 하는 중, 인테리어를 해주시는 실장님과 자주 만났다. 이전할 학원 바로 옆이 카페였던 터라 실장님과 나는 그 카페에서 카페라떼를 마시며 매일같이 이마를 맞대고, 더 좋은 학원 디자인을 이야기했다. 학원의 디자인에 내가 학원을 운영하는 가치관이 녹여지길 바랐다. 그러다보니 학원에 대한 생각, 나의 신념,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성 그런 걸 얘기하게 됐다. 실장님과 한달여를 그렇게 매일같이 붙어있다보니 직업병이 도져서 이젠 아예 실장님 자녀상담, 부부상담, 시어른과의 문제까지 다양한 대화가 이루어졌다. 결국 인테리어는 끝나고, 우리 원은 무사히 이전해서 실장님과는 빠빠이. 그런데 실장님은 매주 1회 한시간 30분을 운전해서 두 딸을 데리고 수업을 받으러 왔다. 그 딸들이 바로 초4 인영이와 초2 은영이.
이것저것 문제가 많다는 은영인 사실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학습이 안되어 있어 하나씩 학습을 시키면 되는 상황! 아주 즐겁게 수업을 잘 받아서 실장님이 90분, 왕복 세시간의 운전시간과 수업 2시간, 총 5시간의 워킹맘의 피같은 시간을 아깝지 않게 했다.
그런데, 그날, 인영이에게 문제가 터졌다. 가족에 대해서 진지하게 속을 꺼내야하는 시간이었다. 속 이야기, 가정사 등등등, 글쓰기에 있어 나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건 감당해야될 일이었다.
말할 수 없다고 버티는 아이. 쓸 수 없다고 손을 움직이지 않는 아이. 다양한 시도를 해보는 교사의 유도에도 꿈쩍도 않으니 같은 반 친구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인영이는 손목을 돌리기 시작했다. 턱.턱.턱 뼈가 부딪히는 소리가 나면서 손목을 각도있게 꺾어 돌렸다. 조금 있다간 목을 돌렸다. 절도있게 터. 턱. 턱. 인간의 목이 그렇게 돌아갈 수 있나 싶었다. 마치 처키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목을 꺾었다 돌아왔다를 반복했다. 반아이들은 얼굴이 파랗게 질려 인영이에게 초집중 시선을 보냈다. 시선을 받을수록 인영이의 증세는 더 심해졌다. 도저히 그곳에 두면 안될 것 같아 반아이들을 다른 선생님에게 맡기고 인영이를 데리고 옆 방으로 갔다.
인영이는 대화를 거부했다. 하는수없이 카페에 앉아서 자매의 수업시간이 끝나길 기다리며 바쁘게 업무를 보고있는 실장님을 불렀다. 그렇게 온순하고 모범적이던 인영의 모습을 보더니 경악했다. 단 한번도 이런 적이 없던 아이. 늘 순종만 했을 뿐, 거부를 몰랐던 아이.
그 아이를 통해서 그 집안의 가정사가 속속 드러났다. 일하지 않고 집에서 노는 아빠, 그 아빠를 두둔하는 할머니, 열심히 죽어라 일하는 엄마, 그럼에도 구박받는 엄마, 가엾은 엄마만 욕하는 할머니, 모든 걸 참아내는 바보같은 엄마, 그 모두를 용서할 수 없는 인영이. 그 아이의 분노는 오럴의 언어로 나오지 못하고 몸의 언어로 표출되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모르고 지나갈 뻔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한 그 상처받은 마음이 글쓰기의 거부로 드러나며 빛으로 나왔다. 그러면 답이 있는 것이다.
상담과 갖가지의 노력 끝에 1년 후 인영이는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고, 여느 그 또래 아이들처럼, 실장님께 전화가 왔다.
글을 쓰는 것도, 글을 쓰지 못하는 것도, 우리를 빛으로 데려다준다. 문제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문제를 아는 것이 해답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