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을 위해 썼으나
소개하진 않은 글. 여기에 남겨두다^^
나는 기억한다.
벚꽃은 졌고,
저 야트막한 언덕엔 아지랑이가 스멀스멀 제 역할을 하려고 기지개를 켜고 있고,
한 낮 재바르게 걷는 통통한 아가씨의 겨드랑이엔 조금씩 땀이 차오르기 시작하던 26년 전 4월의 한 날을.
모솔출신으로서 방년 28세의 봄을 맞이하던 E양과, 본인은 모솔이 아니라고 하나 대략적인 연애이야기를 듣고 보니 빼박 모솔이던 29세의 J군이 결혼식을 올린 그 날을.
행복했다.
웃고 또 웃었다.
너무 웃어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고 내 생의 부모님을 떠나 새로운 가족안으로 편입된다는 두려움도 없이 내내 웃기만 했다.
그날은 그런 날이었다.
인생에서 남자를, 여자를 알지 못했던 두 남녀는, 그러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짝으로 여기며 감사하며 만족하며 달디달고 달디단 결혼생활을 시작했더랬다.
그랬더랬는데...
그 날 이후로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중년의 아줌마가 된 E는 또다른 꿈을 꾸기 시작한다.
혼자만의 꿈.
아무도 알지 못한다.
아니, 알아서는 아니된다.
특히 베개가 잇닿아 있는 옆자리 J는 더욱 더...
26년이라는 시간이 그냥 흐르지는 않았을텐데. 이제는 매일 입는 홈웨어처럼 불편함 하나 없이 '착' 하면 '척' 하고 나오는 사이가 되어 있을거 같은데..
아! 어찌하여 갈수록 쿵 짝이 더 안맞는다는 말이냐?
급기야 E는 J와의 대화를 교묘히 피하기 시작했다.
J가 말을 하기 시작하면 바쁜 척을 한다. 아니 아예 J가 말을 걸지 못하도록 물리적 거리를 둔다.
그가 방에 있으면 E는 주방 식탁에, 그가 작은 방에 홀로 있을라 치면 작은 방과 가까운 주방이 아니라 다시 안방으로.
언제부턴가 E가 어떤 얘기를 꺼내면 J의 대답이 약 35도 쯤 틀어진 양상으로 나온다.
'엥? 내가 생각한 대화의 흐름이 이게 아닌데 이렇게 흘러간다고?
나랑 이렇게 통일이 안된다고?'
어찌보면 E가 원하는 대답을 그가 해주지않는다고, 맞장구를 쳐주지 않는다고 섭섭해서 그렇게 생각하나 싶을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언제부턴가 이야기의 결이 달라짐을 느낀다.
더구나 E가 바라보는 J는 아이같다. 징징대는 아이. 공치사하는 아이. 나는 할만큼했다 생색내는 아이. 중년이 되면 더욱 익어 품위있고 의젓한, 뭐든 품어줄 것 같은 든든한 나무같은 남자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어찌하여 이이는 더욱 아이같냐는 말이다. 아이같은 이는 더구나 옆지기의 힘듦을 보듬을 여력따위는 없어보인다.
언제나 내 힘듦이 먼저인데? 하는 듯 하다.
여전히 아이같은 남편과 밥얻어먹고 새빨래를 누리는게 당연하듯 생각하는 두 딸이 버티고 있는 가정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릴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폭탄맞은 파마머리의 주인공인 일본작가 이나가키 에미코의 <먹고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읽은 것이 E의 마음을 더 흔들어 놓았다.
한끼 이백엔 정도의 밥상으로도 너무나 맛있고 만족할 만한 밥상을 누린다는 에미코의 글을 보고 E도 상상한다.
'원래도 내 밥상은 두부찌개 하나, 콩나물 무침 하나로도 충족되는 밥상인데.. 때 맞춰 장을 보고 몇가지의 반찬을 만들고 메뉴를 고민하는 것은 모두 나 이외의 타인 3명을 위한 것인데...
오십오살의 남편과 이십대가 된 두 딸(이제 미성년자도 없으니)을 두고 나혼자만의 소박한 삶을 꿈꾸면..혹시 실행한다면... 그것이 그리 큰일일까?' 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조용한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월세 삼십 정도되는 방을 얻고 밥값엔 월 이십만원을 넘지않는 소박한 밥상을 꾸리고 새옷은 사지 않으며(지금도 옷은 충분히 많으니) 미용실도 가지않고(지금도 셀프 컷을 한다) 방안에 물건도 많이 들이지않으며 그렇게 간소하게, 정갈하게, 복잡하지않게..
그렇게 살아보면 안될까?
E는 머리를 굴려보고 또 굴려본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생생히 기억하는 26년 전 4월의 그날엔 26년 후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진 꿈에도 모른 채 그 여자, 그 남자 얼굴을 맞댄 채 웃고 웃고 또 웃었었지.
그래도 함께한 시간들을 후회하진 않아.
몽글, 포근한 기억들이 더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