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모임에서 쓴 글.
이제 그 모임은 끝났으니 올려본다.
글선생님께 칭찬 받은 글이랑께요~~ㅎ
ㅡ나는 기억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 일 리는 없고...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무거운 하늘을 가진 1987년 11월의 어느날이었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는 시내에서 도보로 40분쯤 떨어진, 제법 가파른 언덕을 넘고 휑한 들판 길을 부지런히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산밑에 덩그러니 학교만 놓여있던 곳. 17살에 부모님 곁을 떠나 작은방과 더작은 부엌이 있는 조그만 자취방에서 밥을 해먹으며 학교를 다녔다.
일년 내내 농사를 지어도 6남매 거둬 먹이고 공부시키기 턱없어 부족했던 부모님은 당연히도 딸들이 자취하는 곳엔 와볼 여유가 없으셨다. 2살 위, 막 고3에 올라간 언니가 처음 자취방을 구할 때 와보셨고 그 2년 후 내가 입학할 때가 되자 언니에게 보호자 역할을 부탁한 채 자취방엔 오지 않으셨다. 아니, 못오셨지. 일년 내 농사지어도 빚만 늘어가던 가난한 농부 아버지. 병든 시모 봉양과 농사일, 이곳저곳 흩어져 각자에게 주어진 고단한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롱이 다롱이 자식들 걱정에 단 하루도 육신은 물론 마음도 편할 날 없던 엄마.
그분들께 무엇을 바라는게 사치이다, 라고 일치감치부터 생각하고 있던 나는 그래서 엄마가 자취방에 못오시는 것도, 용돈이 넉넉치 않은 것도 당연한 듯 여겼더랬다.
그러던 그 초겨울의 어느 날,
"은영아~~누가 널 찾으시는데~~"
라는 친구의 말에 나가보니
엄마가...그 엄마가..작은 어깨에 피곤한 얼굴을 가진 엄마가 커다란 비닐 봉투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엄마가? 여길? 40분을 걸어들어와야하는 골짜기 이 학교에? 왜?
반가움보다 놀라움이 더 컸던 날이었다. 나는 사실 엄마가 고단한 삶 가운데 나라는 존재 ㅡ딸, 아들, 아들, 딸, 딸, 딸의 많은 자식들 중에 다섯번째의 위치를 차지하는 나 ㅡ를 엄마의 염두에 5프로라도 두고있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는 눈에 띄지않는, 마음이 그다지 가지않는 그림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희미한 존재인 나를 보러 엄마가 버스 한시간, 도보 40분의 겨울길을, 왔다 가면 하루가 거의 꼬박 걸리는 길을 왔다고?
날 위해 그 시간을 쓴다고?
왜?
라는 생각으로 반가움과 더불어 의아함이 들었었다.
엄마는, 지난 3년간 입던, 큰언니가 물려준 얇은 겨울잠바를 다시 입고 자취방으로 나가는, 옷이 춥다고, 새옷을 사달라고 떼를 쓰지도 않는 내모습이 가슴에 콕 박혀
봉화장날인 오늘 집을 나섰다고 하셨다.
추수한 콩을 털어야하는 일이 있었지만 딸내미 걱정에 한시간에 한번씩 오는 버스를 타고 봉화장터에 가셨다고.
친구 옷가게에 가서 가장 따뜻해 보이는 겨울잠바를 하나 들고, 추수하고 돈이 나오는 대로 갚겠다고 얘길하곤 다시 영주로 나오는 버슬 타고 여길 오셨다고 하셨다.
시커멓고 두툼한 겨울잠바.
열일곱 여고생이 찾을 듯한 예쁜 디자인은 아니었지만 엄마에게 그런 말을 할수는 없었다.
그저 딸을 따뜻하게 입히겠다는 생각 하나로 겨울길을 달려오셨을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며, 숫기없는 딸은 "우와~~엄청 따뜻하겠다~~~"
라는 말만 겨우 하고 "엄마 너~~무 고마워~~"이런 말도 못한채 엄마를 보내드렸다.
눈치없는 친구 하나는
"야 그 옷 입으니까 더 뚱뚱해보인다" 라고 했지만
하나도 상관없었다.
그날 만은 내가 여섯 자녀 중 이십 프로쯤의 지분을 가진 자식이 아니라 엄마 맘속 구십프로 쯤 자리를 차지한 자식이 된거 같아 그렇게 마음이 기쁠 수가 없었다.
내 마음이 꽉 찼었다.
그 꽉찬 마음은 이 후 살아가는 내내 엄마 아버지께로 가는 다리가 되었다. 나는 그 튼튼한 다리, 흔들리지 않는 그 다리 위에서 내 존재의 기쁨을 맘껏 만끽하게 된다.
내가 그분들께 무슨 큰 의미가 있을까? 하던 섭섭한 마음은 그 이후론 전혀 들지가 않았다.
그분들이 못해주는건 형편이 안되어서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란걸 충분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이후 삶의 고개고개마다, 예를 들어 대학 학비를 내줄 형편이 못되니 알아서 학교를 다니라고 하시며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서울에 뚝 떨어뜨려 놓았을 때도, 둘째를 낳던 날, 마침 둘째형부의 목사안수식을 위해 서울에 와계시던 부모님이 갓 태어난 손녀 얼굴만 잠깐 보고 행사장으로 가버리셨을 때도, 결혼하고 살림장만 할 때 한번도 옆에 계신 적도, 돈을 보태주지도 못하셨을 때도 나는 서운한 마음이 전혀 들지않았다.
그분들의 사랑의 마음을 알아버린 나는 격랑의 세월을 살아가고 계시는 두분께 보탬이 될지언정 더이상 나에 대한 애정을, 또는 애정이 바탕이 된 행위나 물질을 구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미 배부른 사랑을 맛보았던 것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이제는 진부해보이기까지 하는 이 명제가 내 뇌리에 '확신'으로 자리잡은 그날을 그래서 나는 잊지못한다.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