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네이딘 스트로슨
홍성수ㆍ유연석 옮김
아르테
2023년 10월 5일
얼마 전에 읽었던 카스 무데의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 저자는 “민주주의의 대명사로 여기는 미국에서 오히려 극우의 확산 규모가 속도가 더 빠른 것은 미국 수정헌법 제1조가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 수정헌법 때문에 미국은 극단적인 조직과 연설조차도 보호받아야 하는 언론의 자유가 신성불가침인 나라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 미국은 민주주의의 대명사는커녕 대통령이 법 위에 군림하고, 가족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고, 사욕을 채우기 위한 정책을 당당하게 펼치는 전제주의 국가가 되었다. 나는 그것이 수정헌법의 폐해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독일연방공화국은 우익 극단론자에 너무 무력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대응으로 설립된 나라이다 보니 민주주의적 수단을 통해 극우의 재집권을 막는 데 우선권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래서 내무부 장관이나 연방헌법재판소가 자유민주주의 질서에 적대적인 사회단체의 활동을 금지하거나 억제할 수 있다. 말하자면 표현의 자유도 억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 사례 중 어느 것이 민주주의 체제에 더욱 부합하는 것일까?
십수 년 해외 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첫 번째 참석한 행사가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는 평등길 걷기’였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갈망하는 행동가들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걸으며 입법을 촉구하는 행사인데, 나는 이틀 동안 대전-청주 구간을 함께 걸었다. 지금도 차별금지법 제정은 옳은 일이고 즉각 법제화되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것이 사회적 차별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제하고 보호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혐오와 차별을 직접 겪은, 그냥 당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나치 탄압에 격렬하게 저항한 우드로 스트로슨의 딸인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은 이 책에서 혐오와 차별은 억제(검열)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이라고 선언한다. 앞서 인용한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에서도 혐오와 차별을 물리치는 것은 결국 독일의 억제정책이 아닌 미국의 수정헌법이 고수하고 있는 신성불가침한 언론의 자유라고 이야기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심 그 주장에 설득이 되지는 않았다. 책에서 그런 결론에 이르는 과정이 자세히 언급되어 있지 않기도 했거니와, 차별금지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나로서는 설득되지 않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책을 산 지 일 년도 넘었다. 늘 관심을 두는 주제여서 망설임 없이 샀는데, 어쩌다 보니 한해가 넘도록 쳐다보기만 했다. 더 미루다간 영영 못 읽을 것 같아서 장시간 여행해야 하는 출장길에 챙겨 나섰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책에서 <혐오와 차별은 어떻게 정치가 되는가>를 읽으면서 가졌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았다.
혐오와 차별을 나약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표현의 자유’로 물리칠 수 있다니! 이솝우화에서 찬 바람이 벗기지 못한 지나가는 나그네의 외투를 따뜻한 햇볕이 벗겼다는 판타지 같은 이야기도 아니고. 그 주장이 옳다면 지금까지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해 고군분투한 많은 이들은 모두 어리석은 이들이라는 말인가?
그런 의구심은 저자가 열거한 실증 사례를 몇 줄 읽는 것만으로도 해소되었다. 무엇보다 “혐오와 차별을 금지한다고 하더라도 구제와 처벌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고 실익도 없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결국은 이길 수 있겠지만 그때까지 너무 많은 걸 잃을 것이라는 말이다. 혐오금지법으로 얻을 수 있는 편익에 비해 비용이 너무 크다는 것이니,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고를 수 없는 선택지인 셈이고, 오히려 평범한 개인을 단념시킬 수도 있는 일이다.
실제로 혐오범죄를 저지르는 사람 중 상당수는 확신범인 상황에서는 범죄를 입증하기 어렵다. 또한 처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혐오금지법은 유명무실한 억제책일 수밖에 없다. 처벌이 두렵지 않은 확신범에게는 처벌까지 이르는 데 걸리는 적지 않은 시간은 오히려 선전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호재이니, 왜 그들이 그 법을 두 손 들고 환영하지 않겠는가.
독일의 혐오금지법은 히틀러 등장 이전부터 존재했다. 그 법 때문에 나치 수뇌부가 처벌받고 수감된 일도 있었지만, 그동안 나치는 이데올로기가 억제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고, 지지를 받는 선전효과를 누렸다.
“1977~1978년 스코키 지역의 유대인 지도자들이 지원을 받은 지방공무원들은 처음에는 나치가 원하는 홍보 효과를 피하려고 나치 행진 요청을 허가했다. 법원에서 이 허가 요청이 뒤집혔고, 이 법적 싸움에서 나치가 장기적이고 국제적인 미디어의 관심을 끌 수 있었다. 나치가 계획한 대로 30명이 20~30분 행진하도록 놔뒀더라면 훨씬 더 적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싸움은 나치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이처럼 혐오금지법이 오히려 혐오의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사실은 혐오금지법을 처음 주장하고 끈질기게 요구한 게 소련과 그 동맹국들이었다는 것으로 뒷받침된다. 당시 거의 모든 민주국가들이 이 법을 완강하게 반대했는데, 이는 소련과 그 동맹국들이 공적 기관에 대한 비판을 증오 선동으로 몰아 아예 비판 자체를 금지하려는 속셈을 읽었기 때문이다. 미국의 3대 인권기구인 전미유색인종발전협회, 미국유대인의회, 미국유대인위원회도 처음에는 혐오금지법을 지지하다가 이런 속셈을 알고 반대로 돌아섰다.
그렇다고 미국에서 표현의 자유를 억제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혐오 표현이 검열적인 조치가 아닌 방식으로 막을 수 없다는 ‘구체적, 객관적, 확인 가능한 해악을 직접적이고 명백하게 일으킬 수 있는 경우에만’ 억제를 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억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미국 연방대법원은 메시지가 탐탁지 않거나 불온하거나 두려움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표현을 처벌할 수 있는 정부의 힘을 꾸준히 줄여왔다고 설명한다. ‘표현의 자유는 다른 모든 권리와 자유를 행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독일 신문 타게스슈피겔 편집장인 아나자우에브레이는 “나치즘에 대처하는 미국의 방식(표현의 자유를 신성불가침으로 여기는)은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을 다루는 방식으로 더 성숙해 보인다. 독일이 혐오 표현을 불법화하는 건 마치 토론과 교육에 대한 영구적인 불신을 선언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저자는 이런 상황을 열거하면서 “폭력이나 증오나 차별에 대한 불법적인 선동을 퇴치하는 게 정말로 중요하지만, 정작 표현에 대한 검열 효과가 나타난 것은 없다. 우리 사회에 도움을 주는 건 오히려 더 많은 표현(의 자유)이다”고 말한다.
처음에 이 책의 명제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지만, 저자의 주장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는 이성적인 판단은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혐오 표현의 폐해가 이곳저곳에서 분출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이성적 판단을 심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책은 ‘혐오’라는 주제 때문에 선택하기도 했지만, 소수자 인권 보호에 앞장서고 있는 숙명여대 홍성수 교수의 번역이라는 것이 이 책을 선택한 더 큰 이유였다. 홍성수 교수는 서울대 김승섭 교수와 더불어 내가 가지고 있던 소수자에 대한 편견을 깨뜨린 존경할만한 학자이다. 그런 면에서 책의 후반부에 실린 심리학자 파멜라 퍼레스키(Pamela Paresky)의 언급은 내가 알아 온 사실과 너무 달라서 당황스럽다.
“특정한 (혐오) 단어를 듣거나 특정 발화자의 말을 듣는 것이 자기들에게 해악을 끼칠 수 있다고 믿는 학생들은 자기실현적 예언에 굴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해악을 끼치는 것은 말 자체가 아니라 말이 해악을 끼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결국 혐오 단어가 해악을 끼치는 게 아니라 혐오 단어를 혐오로 받아들이는 게 잘못된 것이라는 셈이니, 혐오 단어로 인한 피해의 책임은 혐오 대상자라는 말이 아닌가.
김승섭 교수를 알게 된 것은 성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혐오가 그들의 건강을 어떻게 얼마나 해치는가에 관해 쓴 글 때문이었다. 역자인 홍성수 교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안이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혹시 홍성수 교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이러한 차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조언을 부탁드린다.
이 책 말미에는 역자인 홍성수 교수가 저자 네이딘 스트로슨을 만나 번역하면서 가졌던 궁금한 점을 직접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그 인터뷰로서 역자가 가진 궁금증이 다 해소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인터뷰가 저자의 의도를 좀 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내 기준으로는 상식에 반하는 명제였지만, 논리적으로는 그 명제를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심정적으로 느끼는 거리감은 차차 공부해가면 해소되지 않을까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