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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11. 2024

2024.04.11 (목)

2021년 2월 마태복음 1장을 쓰는 것으로 두 번째 성경 쓰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 말라기 4장을 마지막으로 장장 3년 하고도 두 달에 걸친 작업을 마쳤다. 마흔 후반에도 꼬박 3년 걸려 쓴 일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때처럼 전체를 쓴 게 아니라 각 장에서 열 절 정도만 추려서 쓴 것이니 분량으로는 4할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전에 비해 분량이 작아서인지 쓰는 게 그다지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그때는 짧아도 한 시간 이상씩 써야 했으니 말이다.


성경을 다시 쓰기로 마음먹은 데는 무슨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니다. 벌써 오래전 일이라 그때 무슨 생각으로 시작했는지 사실 생각도 나지 않는다. 남의 땅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것 자체가 고단한 일인데 몇 년째 소송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그저 어디 기댈 곳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을까.


성경 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해 서울로 돌아올 것이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소송이 끝나 보류됐던 공사비를 받고 다시 한번 시장을 공략해보리라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업책임자로 소송을 포기한다는 것도, 십수 년 사우디 시장에 쏟아부은 열정을 무위로 돌리는 것도 내 선택지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런데 성경 쓰기를 시작한 그해 서울로 돌아왔고, 정착했고, 쓰기를 마친 지금은 쓰기를 시작했을 때 내가 마주했던 상황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옛일이 되었다. 억울함조차 잊었다는 말이다.


돌아보면 지금까지 내 의지와는 무관한 삶을 살았다. 나라고 계획이 없었을까마는, 계획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졸업하고 연구소에 들어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깨닫기까지 2년 반이 걸렸다. 그곳은 내 능력에 부치는 자리였다. 그래서 기업으로 옮기면 모자라는 능력을 손발 부지런히 놀리는 것으로 만회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직장을 옮기는 게 아니라 길을 바꾼 것이니 그래도 몇 년을 버틸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이 40년을 넘길 줄은 몰랐다.


남들은 40년을 한 직장에 있었다니 내가 꽃밭을 걸은 줄 안다. 천만의 말씀이다. 나는 40년을 그야말로 살아남았다. 감원과 정리해고 고비를 수없이 넘기고, 회사가 부도났을 때 어떻게서든 회사와 동료를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쏟았다. 사양길에 접어든 건설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실패를 거듭한 기억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다가 마지막 승부처라고 생각해 도전한 곳이 사우디 시장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거둔 것 없이 돌아와야 했다.


이쯤 되면 내 삶은 망가질 대로 망가졌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나는 놀라울 정도로 멀쩡하다. 오히려 서울로 돌아올 때 짐작조차 못 했던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호기심 많고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니 잘 지낼 줄은 알았다. 그래도 이 정도일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은혜 말고는 이 신비를 해석할 방도가 없다.


뜻하지 않게 번역서를 내고, 이름을 얻고, 이젠 내 이름으로 된 책도 생겼다. 이제 또 다른 도전을 앞두고 있다. 은혜의 결과이겠지만, 아울러 주변에 있는 많은 분들이 내게 베푼 친절과 배려에 힘입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3년 전 성경 쓰기를 시작한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잉여인간이 되었다는 자각 끝에 잡부로 일했던 현장에서도 숙소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쓰기를 이어갔고 여행 갈 때도, 사람 만나러 가서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두 아이와 함께 지내는 시간에도 거르지 않았다. 밀리는 날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다음 날 밀린 것까지 몰아서 썼다.


성경을 쓰는 것은 성경의 뜻을 새기기 위한 것이지만 사실 그런 날보다 그저 기계적으로 쓰는 날이 더 많았다. 그래도 썼다. 적어도 쓰는 시간만큼은 내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게 드러나는 것이니 말이다. 나를 믿을 수 없으니 그렇게라도 자신을 옭아매야 했다.


그러니 성경 쓰기를 여기서 끝낼 수는 없는 일이다. 내일 다시 마태복음부터 시작!


♣ 그간 만년필도 고생 많았네. 언젠가 성경 쓰기가 끝나는 날 혜인이가 잘 이어서 쓸 걸세. 조금 더 수고하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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