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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Apr 29. 2024

2024.04.29 (월)

현지법인에서 근무하는 동안 발주처에 사업을 제안하는 일이 많았다. 사업 제안은 무엇보다 상대가 흥미를 잃지 않도록 만드는 게 중요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제안 내용을 한 번 들어서 바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쉽고 선명하게 설명해야 한다. 선명하게 설명하는 데는 숫자만 한 것이 없다. 하지만 익숙하지 않은 숫자는 오히려 지루할 수 있어서 숫자를 설명할 때 상대에게 익숙한 숫자와 비교해 흥미를 잃지 않도록 했다.


책을 내고 나서 그와 관련한 내용을 설명할 일이 많아졌다. 늘 해오던 대로 가능하면 숫자로 설명하려고 했고,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익숙한 숫자를 찾아 그 숫자와 비교하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은 사우디가 석유 수출로 벌어들이는 돈이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적은 돈은 아닌데, 그렇다고 화수분처럼 샘솟듯 쏟아지는 정도는 아니다. 그 크기를 설명할 때 미국 에너지정보국(USEIA)에서 발표한 석유 수출액을 제시하면 편하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석유 생산량에서 내수 소비량을 뺀 것이 수출량이고, 거기에 평균 유가를 곱하면 수출액을 어림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금액을 우리나라 국가 예산과 비교해 설명한다. 하지만 국가 예산도 얼마나 큰지 짐작하기 쉬운 숫자는 아니어서 한동안 삼성전자 매출과 비교했다. 그 숫자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는 했지만, 사우디 석유 수출액이 생각만큼 크지 않다는 것을 설명하는 데는 그것보다 직관적인 숫자가 없다는 생각은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그렇게 설명할 때마다 여지없이 매출과 순익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난하는 댓글이 달린다. 삼성전자 매출과 비교할 때 분명히 “크기를 짐작하기 위해서”라고 부연 설명을 하는 데도 그런 댓글을 다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딱하다. 알아듣고서도 내용이 못마땅해서 그럴 수 있지만 그보다는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뿐 아니다. 다른 비난 댓글도 제대로 듣지 않고 일부분만 끄집어내서 지적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지적하는 내용 바로 앞이나 뒤에 그렇지 않다는 설명을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어쩌면 그것이 요즘 정보를 소비하는 방식이 아닌지 모르겠다. 듣고 싶은 것만 듣거나 맥락과 관계없이 자기주장에 필요한 부분만 인용하는. 그건 그래도 내용 중에 들어있기라도 하지, 심지어는 하지도 않은 말을 가지고 천연덕스럽게 비난하는 경우도 하나둘이 아니다. 논증에서는 그것을 ‘허수아비 때리기’라고 하더라만.


얼마 전에 박유하 교수의 저서를 문제 삼은 명예훼손 소송이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이 내려졌다. 그 소식을 듣고 몇 년 전에 썼던 탄원서를 브런치에 다시 올려놓았는데, 어제 보니 거기에 ‘허수아비 때리기’ 비난 댓글이 달렸다. 사법부가 보수 편향되어 역사 왜곡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댓글에서 지적한 내용은 책에 언급된 일도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려운 말을 써가며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았다. 게다가 세월이 지나 반백이 되었다면서 은근히 어른이라는 걸 강조하고 있었다. 어른이면 어른답게 근거를 들어 글을 쓸 일이지. 그게 지하철 탈 때마다 지겹도록 “건강하세요” 소리를 들어야 하는 사람에게 할 말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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