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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잉여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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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11. 2024

2024.06.11 (화)

두 해 전에 사우디 현지법인을 닫은 것도 아니고 닫지 않은 것도 아닌 상태로 돌아와 몇 달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상황만 보면 희희낙락할 처지가 아닌데도 노는데 한번 맛을 들리니 그것도 재미가 쏠쏠했다. 그러다 문득 잉여인간이 된 자신을 발견했다. 비록 성과는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그래도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있었는데, 이젠 누군가 메고 있는 짐 위에 내가 올라앉은 기분이 든 것이다.     


사십 년 넘게 직장이라고는 두 곳만 다녔고 두 곳 모두 이력서는 써보지도 않았던 내가 부랴부랴 이력서를 만들어 구인 광고 난 곳이라면 가리지 않고 보냈다. 헤아려 보니 이백 군데가 넘었다. 희망 직종을 사무보조로 한정하고, 어떤 일이든 해낼 의지가 투철하다는 점을 강조해서. 내 경력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것이기 때문이었다.     


딱 한 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잘 해낼 수 있는 분이라는 걸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직원 편하게 만들자고 사무 보조원을 뽑는데, 그 직원이 어려워서 어떻게 일을 시키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회사가 주최하는 행사에 아르바이트로 일하기를 권했다. 며칠 아르바이트로 짭짤하게 보내고 그 후로 이력서 보내는 건 그만뒀다.     


한동안 사우디 이슈로 생각지도 않게 바쁘게 지냈지만 어차피 내 일이 아니었으니 한때 그러다 말 일이었다. 회사에 비상근으로 이름은 올려놓고 있지만 현업에 복귀할 기회가 있을 것도 아니고, 있다고 해도 후배들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는 일이어서 그렇게 내 시간이 저물어가고 있었다. 혹시 운 좋게 다시 일할 기회를 얻는다고 해도 그동안 내가 해오던 일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일어났다. 현장 사업관리단에 나갈 생각이 있느냐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당장 그러마고 대답하지 못했다. 몇 년을 혼자 살아야 한다는 것도 그렇지만 거리낄 것 없이 살던 게 이미 몸에 배어 틀에 얽매여 사는 게 가능할까 싶었기 때문이다. 가당치 않은 생각이라는 것을 바로 깨닫고 그새 마음이 바뀌었을까 서둘러 전화해 가겠다고 했다.     


늘 하던 일이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중에서도 잘하는 축에 들었던 일이어서 하는 일 하나하나가 새롭고 즐겁다. 잠깐 사이에 일과가 끝나 하던 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퇴근하는데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하면 좀 더 잘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내게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고 묻더라 마는, 그것으로는 부족하겠다. 일하면서 속 끓일 일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일단 오늘은 오늘 분복만큼 누리자꾸나.          

내일 뜰 해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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