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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25. 2024

계간 <보보담> 2024년 봄

LS네트웍스

사회평론아카데미

2024년 4월 30일


이번 보보담 봄 호는 마산을 다루고 있다. 이제는 창원시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가 되었지만 내가 거제도 현장에서 일하던 80년대 초반만 해도 창원은 신생 도시에 지나지 않아 마산과 경쟁할 상대가 되지 않았다. 물론 83년도에 경남도청이 이전하기는 했어도 창원은 도시 대부분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마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창원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데 대해 마산 사람들은 언짢은 정도가 아니라 몹시 분개할 만큼 불편해한다. 그것 또한 세월의 변화를 거스를 수는 없는 일이지만, 마산이 융성하던 때를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그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한일합방 후의 일이라니 한편으로 어이없기도 하다.


함께 일하던 후배 중에 마산 출신이 있었다. 그 친구 덕분에 몽고간장을 알았다. 부친이 경영하신다고 했다. 몽고간장집 아들이었던 것이지. 그런데 왜 난데없는 몽고라는 이름을 붙였는지는 알지 못했다.


마산에 몽고정이라고 있단다. 여몽연합군이 사용했던 우물이라서 그렇게 이름이 붙었고 그 이후로 8백여 년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몽고정 물로 만든 게 몽고간장이라는 것이고. 여몽연합군이 마산에 주둔했던 것은 일본의 존재를 의식한 몽골(원나라)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복속을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일본을 정벌하기로 하고 그 기지를 마산에 두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정벌에 내심 반대했던 고려는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이를 방해했다고 하고. 몽골은 1차 정벌 2차 정벌 모두 실패했는데 2차 정벌 때 패퇴하게 된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신풍, ‘가미가제’였다.


<보보담>의 사진이야 워낙 정평이 나 있는 것이지만 이번에는 매우 희귀한 역사적 사료를 열 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09년 순종이 마산을 순시했는데, 당시 사진이 아주 양호한 상태로 올라 있다. 당시 대신들의 복장이며, 순시단이 타고 다녔던 열차며, 이들을 구경 나온 백성들까지. 당시를 배경으로 하는 시대극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이젠 드라마가 역사의 기록물이 될 수도 있겠다.


이번 호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김려라는 선비가 마산에서 유배 생활하면서 썼다는 <우해이어보 牛海異魚譜> 이야기였다. 마산 앞바다가 소머리처럼 생겼다고 해서 그 동네를 우산(牛山)이라고 부르고 그 앞바다를 우해(牛海)라고 불렀다는 것이니 결국 <우해이어보>는 우해에 나는 기이한 물고기(異魚)에 관한 족보(魚譜)라는 뜻이렸다.


이 글을 쓴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박사과정의 곽지은 선생은 어보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어보는 18-19세기 지식인들의 취미와 관심사를 보여준다. 당대 지식인들은 사무에 관한 상세한 관찰과 지식의 체계화를 추구하는 박물에 큰 관심을 가졌고 어보도 이런 맥락에서 탄생했다. 물고기 외에도 수석, 식물, 다양한 대상에 대한 문헌이 다수이며 그중 자산어보가 유명하다.”


그런데 이 글의 필자는 정작 어보의 내용보다는 어보를 쓴 김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김려는 1979년 천주교 박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에 유배된다. 그는 유배라는 쓸쓸하고 외로운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타인을 사랑하고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자 했다. 하지만 부령에서 정착하는 것 역시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1801년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김려가 연루되었던 사건에 대한 재조사가 이루어지고, 그는 중앙에 끌려가 문초를 받은 후 다시 우해로 이배된다. 그는 우해로 이배되기 전 부령 사람들을 회상하면서 <사유악부>를 쓴다. 지역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을 진솔한 표현으로 담아낸 걸작이다. ‘무엇을 생각하나 저 북쪽 바닷가’로 시작하는 300여 수의 연작시는 주변을 향한 따뜻한 시선, 유배 중 세상을 떠난 부친에 대한 죄책감, 그리움 등 다채로운 내면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는 부령에서 짐을 챙길 겨를도 없이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이배와 계속된 문초로 인해 진해에 머물던 유배 초기에 많은 혼란과 외로움을 느낀다. 이러한 괴로움은 <사유악부>에서 자신이 이배 과정에서 잃어버린 여러 물건에 담긴 추억을 그려내며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대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려한 문장의 뒤편으로 며칠씩 낚시는 뒷전으로 하고 바닷속만 들여다보면서 각종 괴로움과 상념들을 풀어내던 쓸쓸한 선비의 모습이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무한한 슬픔에만 빠져있기에는 그가 가진 문학에 대한 열망과 사랑이 너무나도 컸다. 그의 그리움이 새로운 공간을 만나며 형성되 새로운 세계가 바로 이 <우해이어보>이다.”


“그의 생애는 유랑의 연속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기록의 연속이기도 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모든 것을 글로, 시로 풀어내고자 했다. 자산어보 같은 다른 어보들이 박물학(여러 문물을 기록하고 남기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 것과 다르게 그는 자신이 직접 보고 들은 주변의 신기한 모습들을 기억하기 위해 어보를 썼다. 그래서인지 각 생물에 대한 간략한 설명 뒤에 붙은 시 역시 당시 자신이 겪은 주변의 풍속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맛에 관한 그의 묘사는 다른 문헌의 글을 베낀 것이 아니라 직접 먹어보지 않고는 적을 수 없을만큼 상세하고 진솔하다. 이런 점에서도 <우해이어보>라는 텍스트의 독특한 성격과 그의 독특한 면모가 드러난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적지 않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잘 모르고 살아왔다. 서울에 돌아오고 나서 나 자신을 들여다볼 시간이 많아지면서 비로소 내가 호기심이 무척 많은 줄 깨달았다. ‘사람에 대한 연민’을 지닌 사람, 그런 사람이 쓴 글에도 관심이 많고, 그런 글에 쉽게 공감하고 감동하는 편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 때문인지 블로그에 스크랩 해놓은 인터뷰 기사가 2천 편이 훌쩍 넘는다.


언젠가는 생전 읽지 않던 소설에 감동해 그 작가의 작품 거의 전부를 섭렵한 일도 있다. 지난 시간 너무 메마르게 살았다는 깨달음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런 내게 “김려에게 우해는 낯선 땅이기도 했지만 그가 그리워하던 또 다른 바다이자 애착의 대상이기도 했다”는 필자의 글은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얼마 전에 같은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출신인 강민경 선생의 <이규보 선생님 고려시대는 살만했습니까> 소개 글이 인상 깊어 구매 목록 첫머리에 올려놓았다. 이분들의 스승인 안대회 교수의 글을 늘 감탄하고 공감하며 읽었는데, 제자도 훌륭하게 키우셨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 글의 필자 곽지은 선생의 이름도 잘 기억해 놓아야겠다. 언젠가 훌륭한 저자로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마창진’이라는 이름이 낯설지 않게 된 것은 아마 2천년대 들어서가 아닐까. 이제는 그나마도 없어지고 창원이라는 이름만 남은 마산. 진해 벚꽃이 유명한 것이야 세상이 다 아는 일이고. 그렇다면 마산도 그에 못지않을 것인데 거제도 현장에서 일할 때 가까운 마산을 놔두고 굳이 진해까지 가는 미련한 짓을 했다. 책의 첫 열 페이지를 가득 채운 마산합포구의 벚꽃 사진을 보면 든 생각이다. 언제 봐도 <보보담>의 사진은 참 기막히다.


마산이라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아귀찜에 얽힌 이야기, 마산 수출자유지역이 융성하던 시절에 대한 회고, 그리고 이만기와 강호동으로 대표되는 마산상고, 마산 씨름 이야기도 실렸다.


https://www.lsnetworks.com/upload/bobodam/bobodam_052_%EB%B4%84.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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