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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인식 Jun 28. 2024

오일 카드

<피렌체의 식탁> 박인식의 호기심 따라 읽기 13

웹진 <피렌체의 식탁>에 열세 번째 서평이 올라왔습니다. 이번에는 오래 전 사우디 부임 초기에 사우디와 중동을 이해하기 위해 읽었던 제임스 노먼의 <오일카드>를 다시 읽었습니다.


링크는 아래에 올립니다. 응원하는 마음으로 클릭 한 번...


♣♣♣


오일 카드

제임스 노먼

전미영 옮김

도서출판 AK

2009년 8월 28일


2009년 초 사우디에 무지한 상태로 부임해 뭔가 실마리라도 잡아보겠다고 중동 관련 서적을 살피다가 처음 고른 것이 이 책이었다. 이 책은 1970년부터 2008년까지 유가 추이를 나타낸 그래프로 시작하는데, 여기에는 1980년대 초반의 유가 하락은 소련을 2000년대 초반의 유가 상승은 중국을 겨냥해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는 주석이 붙었다. 이 책은 석유를 둘러싼 중동 산유국과 주변 열강의 각축을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었지만, 그런 내용은 다 잊고 오로지 미국이 사우디의 협조를 얻어 소련과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유가를 조작했다는 내용만 오래도록 머리에 남아 이후 한동안 중동의 모든 상황을 음모론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최근 중동 정세를 연구하는 학자를 만나 내가 그동안 중동에 대해 가졌던 이해가 합리적이었는지 점검할 기회가 있었다. 유가에 대한 음모론 역시 빠질 수 없는 주제여서 이 책에서 주장하는 바에 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물론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처럼 그것을 사실로 여기고 물은 것은 아니다. 설마 십수 년 사우디에서 일하면서 보고 들은 게 있는 내가 그것을 사실로 여기고 묻기야 했을까. 대신 그런 구도가 가능할 만큼 미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인지 물었다. 그는 그럴 수 있을 만큼 미국의 영향력이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런 사실이 있었을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포브스와 비즈니스 위크 기자였던 제임스 노먼이 이 책에서 주장한 음모론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미국으로 대표되는 자유 진영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공산 진영으로 세계가 나뉘었던 냉전 시기에 미국이 소련을 무너뜨리기 위해 유가를 인위적으로 끌어내려 소련의 재정을 압박했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소련은 사우디에 이어 세계 두 번째 산유국으로 국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석유 수출에 의존했다. 미국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이 중동을 지배하려 한다는 프레임으로 사우디를 압박해 유가를 낮추도록 만들었다. 당시 소련은 유가가 1달러 하락하면 한 해 수입이 5~10억 달러 줄어들고 유가가 3달러 하락하면 국가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을 상황이었다. 유가를 낮추면 그 손해가 온전히 사우디로 돌아가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당시 사우디는 유가를 떠받치기 위해 생산량을 1/3까지 감산했는데도 다른 OPEC 회원국들의 이탈로 수입은 엄청나게 줄고 시장점유율도 잃은 상태여서 시장점유율을 복구하기 위해 유가가 떨어지는 걸 감수하면서 증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일 만했다는 말이다. 한편 이라크와 전쟁으로 자금 부담에 시달리던 이란은 페르시아만을 통행하는 유조선을 공격하겠다면서 유가를 올리라고 사우디를 위협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레이건 대통령은 1985년 파드 국왕이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이란의 모든 군사적인 움직임으로부터 사우디를 보호하겠다고 약속했다. 미국 역시 산유국이어서 저유가의 여파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미국의 독립계 석유ㆍ가스 기업이 도산하고 은행도 구제 조치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미국의 메이저 석유회사들은 워낙 자본이 풍부한데다가 다운스트림 분야에서 이익을 냈고, 부채도 적고, 부풀려진 비용구조에서 군살을 뺄 여지가 있었기 때문에 고비를 잘 넘겼고, 그 후에는 오히려 더 강력해졌다. 한편 소련 군수품 최대 고객이었던 중동 국가들의 재정 악화로 무기 판매도 급격하게 줄어들자 소련은 이중삼중의 고초를 겪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전략으로 유가를 절반으로 떨어뜨린 채 10년 이상 가격 상승을 막아 결국 소련을 파산으로 몰아넣었다.”


두 번째, 가까운 장래에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를 위협할 수 있는 유일한 국가인 중국에 대응하기 위해서 유가를 인위적으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고유가를 유지하면 미국도 피해를 본다. 그러나 미국이 감기를 앓으면 중국은 폐렴에 걸리기 때문에 감당할만했다.


“1990년대 초까지 소량이지만 석유를 수출하던 중국은 경제성장에 따라 에너지 수요가 급증하면서 에너지 확보에 나섰다. 중국이 2003년 이라크 유전에 접근하자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중국의 시도를 무산시켰다. 당시 미국과 중국 모두 석유 수요의 60%를 수입했는데, 이를 위해 미국은 GDP의 3%를 지불하는 데 반해 중국은 6%를 지불해야 했다. 중국은 철강ㆍ알루미늄ㆍ화학ㆍ시멘트 같은 에너지 집약적 전략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온 힘을 쏟아왔기 때문에의 2001년부터 에너지 사용량이 GDP 증가율의 1.5배 속도로 늘어났다. 에너지 효율도 낮아 전 세계 GDP에서 중국의 비중은 6%이지만 에너지 수요는 전 세계의 15%나 차지했다. 실제로 2001년 당시 중국 공장들은 일본에 비해 에탄올 생산하는데 에너지를 41% 더 사용했고, 시멘트 공장은 31%, 전력 생산은 17%를 더 사용했다. 결국 중국은 에너지를 산업제품으로 바꾼 셈이었다. 그래서 고유가가 되면 중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힐 뿐 아니라 그동안 피해를 감수하며 협조해 준 사우디, 그리고 우방인 캐나다와 멕시코에 선물을 안길 수 있었다. 물론 이 결과로 마지못해 손잡고 있는 러시아가 혜택 입는 것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러시아와 중국을 분열시켜 양국이 공동으로 서구에 대응하지 못하도록 만들 수 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도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고유가로 인해 미국도 곤란을 겪지만 석유 메이저의 지분 상당 부분이 미국기업이나 금융기관 소유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정도 곤란은 충분히 감당할만했다.”


저자의 설명대로라면 미국은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저유가와 고유가 정책을 쓴 것이다. 하지만 그 여파는 미국이 제거하려 했던 소련과 중국에 그치지 않고 애꿎은 많은 나라들을 고통에 밀어 넣었다. 그렇다면 미국이 세계를 상대로 범죄를 저지른 셈인데, 그런 주장을 내세우려면 그를 뒷받침할 증거를 제시해야 하지만 저자의 설명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저자는 소련을 겨냥해 미국이 저유가 정책을 썼다고 말하지만 근거는 정황 증거뿐이고 중국과 관련해서는 명시적으로 미국이 고유가 정책을 썼다고 설명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모든 서술은 독자가 미국이 중국의 발목을 잡기 위해 그런 정책을 펼친 것으로 생각하게끔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구체적 언급이 없다, 논쟁의 여지가 있다, 전적으로 그런 정책에 의존했을 것이라고 믿기 어렵다”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음모론을 제기해놓고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변명으로 읽힐 여지마저 있어 보인다.


음모론이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것은 문제를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을 겪은 사람은 누군가에게 그 책임을 묻고 싶게 마련인데, 음모론이 그에 대한 대답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음모론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도 드물지 않다. 물론 어떤 사실을 설명할 때 여러 가지 가설과 추론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에게 책임을 묻거나 누군가를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온다면 그런 주장을 펼치는 것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서문에서 그런 질문을 예상했다는 듯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석유산업과 정부 혹은 애널리스트라면 예외 없이 이런 주장을 부인하고 비웃을 것이다. 그럴 때 나로서는 ‘인정한다, 나는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알고 있는 익명의 사람들로부터 정보를 얻었다. 그들은 감히 이름을 밝히지 못할 입장이며, 설사 밝혔다고 하더라도 아무도 그들의 말을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응할 수밖에 없다.”


처음에도 이 부분을 읽었을 텐데 나는 오랫동안 저자가 주장한 음모론이 사실인 것으로 생각했다. 이 책을 다시 읽은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아니라는 증거를 가진 것도 아니다. 다만 이 음모론의 또 다른 당사자인 사우디에서 십수 년 일하면서 한두 국가의 의지만으로 조작할 만큼 유가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물론 미국이 펼친 정책이나 그에 대한 사우디의 호응이 유가를 결정하는 한 가지 요인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이 가진 문제는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로 호도했다기보다는 일부 원인이 마치 전체 원인인 것으로 왜곡 과장했다는 정도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실 허위보다는 왜곡 과장이 폐해가 더 큰 것이기는 하지만.


오랫동안 고유가 저유가 정책만 기억에 강하게 남아있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귀담아들을 만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공습해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것은 미국의 석유 금수조치 때문이었다. 당초 러시아 동부를 공격하려던 일본은 이 조치로 석유를 확보하기 어렵게 되자 인도네시아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필리핀과 하와이를 공격한 것이다.”


“중국은 남사군도를 놓고 베트남, 대만, 필리핀, 말레이시아와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다. 동중국해에서는 일본과 해양 영토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두 가지 모두 엄청난 양의 석유와 가스 매장량이 원인이다. 1968년 유엔에서는 에너지자원 측면에서 이 지역이 ‘또 다른 페르시아만’이라고 규정한 보고서를 발간했다.”


비록 이 책이 저유가 고유가 현상이 미국이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 펼친 정책의 결과라는 왜곡되고 과장된 주장을 펼치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이 책 덕분에 국제분쟁을 일으킨 원인의 대부분이 석유라는 것과 유가가 어떤 과정을 거쳐 결정되고 그 결과가 어떤 파장을 만들어 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마치 독을 품은 복어와 같다는 느낌이다. 복어는 독만 제거하면 맛있는 음식의 재료가 되지만 복어가 품은 독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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