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브 왁스만
장정문 옮김
소우주
2024년 3월 24일
아랍 연맹은 처음부터 두 진영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한쪽에는 요르단ㆍ이라크가 다른 쪽은 이집트ㆍ시리아ㆍ사우디가 속해 있었다. 당시 요르단 압둘라 국왕은 팔레스타인을 합병하려는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고 (이후에는 시리아와 레바논도) 반대쪽 진영에서는 이를 반대했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분할 계획이 발표되자 아랍 연맹은 이를 거부하며 유대국가가 세워질 경우 이를 제거하는 전쟁도 각오해야 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위협했지만, 압둘라 국왕은 유엔 분할 계획을 지지하고 유대 기구(팔레스타인 유대인 공동체의 실질적 정부)와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 요르단이 이스라엘에 할당된 지역을 공격하지 않는 대가로 팔레스타인 아랍인에 할당된 영토 일부를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아랍 연맹에 속한 이집트ㆍ요르단ㆍ시리아ㆍ레바논ㆍ이라크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자국의 이익(비록 통치자의 이익에 가까웠지만). 겉으로는 팔레스타인을 대신해 행동에 나서는 것이라고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영토에 대한 탐욕과 권력 경쟁이 훨씬 더 큰 이유였다. 그렇다고 해서 아랍국가들이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의 절박한 처지에 관심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랍 세계의 여론은 팔레스타인의 대의를 강력하게 지지하고 시온주의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만약 아랍국가들이 이런 대중적 정서를 무시하고 시온주의자(나중에는 이스라엘 군대)들이 팔레스타인인을 쫓아내는 걸 보고도 방관했다면 이는 국내 정치 불안을 야기해 그렇지 않아도 취약한 정권의 안정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아랍국가의 군사적 개입은 국내 여론을 고려하고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오늘날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국가 간 전쟁이 아니라 국가 대 비국가 세력 간의 비대칭 전쟁이며, 이로 인해 아랍 측의 민간인 사상자는 늘어났지만 이스라엘 사망자는 훨씬 적다.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지라고 부르는 것은 이스라엘과 일부 다른 지역, 특히 미국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점령지라는 용어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지배자이자 억압자로 느끼게 하는 정치적 함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엔이나 유럽연합과 같은 국제기구와 국제사회 전반에서는 이 단어가 지닌 법적 의미를 살리기 위해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제법에 따르면 영토에 대한 주권을 인정받지 않은 나라가 해당 영토를 실효적으로 통제하고 있을 때 그 영토가 점령되었다고 정의한다. 이스라엘 정부는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점령지(occupied territory)로 지정하는 것에 지속해서 반대 뜻을 표해 왔고 대신 공식적으로 분쟁지(disputed territory) 또는 관리지(administrated territory)라고 부르기 원한다.
현재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약 37만 명의 팔레스타인인은 법적으로는 이스라엘 영주권자이다. (시민권을 신청할 수는 있지만 허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는 동예루살렘의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이스라엘 법을 적용받는다는 의미이다. 이스라엘의 복지 혜택을 받고 이스라엘 병원에서 치료받을 수 있다. 이스라엘 대학에 다닐 수 있고 이스라엘 내에서 일하거나 여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동예루살렘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의 상황은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주민보다 낫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지구를 적대적인 존재로 취급하고 육로와 해상과 공중을 봉쇄해 상품 수출입을 엄격하게 제한하며, 극히 드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인의 가자지구 출입을 막고 있다. 하마스가 가자지구 내부를 완전히 장악하고 이 지역을 통치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스라엘은 가자지구가 더 이상 점령지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이스라엘인도 이런 견해에 동의한다.
오슬로 협정이 체결되자 이스라엘과 PLO가 이스라엘 군이 철수한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의 특정 지역을 관리 통제할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설립하는 데 합의했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국가는커녕 정부도 아니었고, 그래서 권한과 자율성에 제한이 있었지만 포괄적인 평화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부분적이나마 자치권을 행사했다. 이들은 팔레스타인인을 위한 공공 서비스와 일부 지역의 치안과 보안관리처럼 기존에 이스라엘 방위군이 담당하던 업무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양측 합의하에 팔레스타인인이 주로 거주하는 도시와 규모가 큰 마을을 A구역으로 지정해 자치정부가 모든 민사와 치안을 담당했다. B구역에서는 자치정부가 민사 업무를 담당하고 이스라엘이 치안을 담당했으며, C구역에서는 이스라엘 군이 모든 것을 통제했다.
오늘날에도 매년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인이 이들을 통제할 목적으로 만든 법률 또는 규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이스라엘 군사 법원에서 재판받는다. 서안지구의 모든 팔레스타인인은 거주지와 관계없이 이스라엘 군사법을 적용받으며, 범죄 혐의로 기소될 경우 서안지구에서 일어난 것인지 관계없이 군사법원에 넘겨진다. 이스라엘에 대한 테러 계획이나 실행과 같은 안보 관련 범죄로부터 일반 형사 범죄, 교통 법규 위반과 같은 사소한 범죄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팔레스타인인과는 달리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이스라엘인(정착민)은 군사법이 아닌 이스라엘 법을 적용받으며 이들은 서안지구 군사법원이 아닌 이스라엘 민간법원에서 재판받는다.
1967년 5월, 당시 요르단 통제하에 있던 서안지구에는 이스라엘 시민이 단 한 명도 살지 않았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오늘날, 이 지역에는 약 40만 명의 이스라엘인이 100여 개의 민간인 공동체, 즉 정착촌에 거주한다.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서안지구를 정복한 이후 이 지역에 이스라엘 정착민 인구가 급증했고 영토 전체로 정착촌이 확산되었다. 이른바 이스라엘 서안지구 식민지화라 할 수 있다.
1968년만 해도 이 지역의 이스라엘인은 5곳의 정착촌에 사는 250명이 전부였지만 1967년 전쟁 10년 후인 1977년 1,900명이 38개 정착촌에 거주했고, 1987년에는 118개 정착촌에 49,000명, 1997년에는 15만 명, 2007년에는 28만 명, 2017년에는 130개 공식 정착촌에 40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초기 시온주의자들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서안지구에 정착촌을 건설했다. 1967년 이후 역대 이스라엘 정부는 다양한 이유로 정착촌 건설을 지지해 왔다.
서안지구 유대인 정착민은 이념적 이유보다는 경제적 이유로 그곳에 살고 있다. 정착촌의 주택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삶의 질이 더 좋기 때문이다. 정착민들은 일반적으로 그린라인과 가까운 위치에 모여 있는 대규모 교외형 정착촌에 거주하며, 이들을 위해 특별히 건설한 도로를 통해 이스라엘 안으로 빠르고 쉽게 출퇴근한다.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성인은 대부분 이스라엘에서 일한다) 약 4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형 정착촌인 마알레 아두밈은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불과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서안지구 정착민들은 주택담보대출 보조금, 특별 교통수단, 교육 혜택 등 다른 이스라엘인들에게는 제공되지 않는 다양한 정부 혜택을 받는다. 정착촌의 학교 역시 이스라엘의 학교보다 더 많은 정부 지원을 받고 있으며 교사의 급여도 많다.
이스라엘 국민은 서안지구 정착촌 사업을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어 있다. 2017년 여론조사에서는 정부의 서안지구 정착촌 건설 정책이 이스라엘 국익 측면에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응답자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응답자가 정확히 반으로 갈렸다. (양쪽 모두 46%) 정착촌과 정착민에 대한 이스라엘인의 비판은 유럽인이나 미국인이 이를 비판하는 논점과 다르다. 정착촌을 건설하고 보호하는 데 드는 비용 문제와 극단주의 성향을 지니는 정착민들이 이스라엘 방위군과 이스라엘 민주주의에 가하는 위협 때문이다. 이스라엘 정착촌에 대한 비판은 국제법상 불법이고, 팔레스타인인에게 해가 되며,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를 방해하는 장애물이라는 데 초점이 모인다.
이스라엘 정착촌 비판론자들은 이스라엘의 정착촌 건설이 서안지구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에게 심각한 피해를 준다고 주장한다. 팔레스타인 토지를 수용해 정착촌을 건설하는 경우가 많은 데다 심지어 개인의 토지를 수용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땅을 도둑질하는 한 팔레스타인 지도부가 이스라엘과 평화 회담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