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미정ㆍ마흐디 압둘하디
아랍문화연구소
2018년 3월 2일
이스라엘 유대인 작가 보아스 에브론이 1995년에 출판한 <유대국가인가 혹은 이스라엘인의 국가인가?>에서 밝힌 시온주의가 내세우는 핵심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팔레스타인은 성서에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고 모세의 후예인 고대 이스라엘인에게 약속한 땅이다. 2) 아브라함은 기원전 17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3) 아브라함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족장이다. 4) 고대 이스라엘인은 기원전 13세기에 팔레스타인 땅을 정복하고 정착했다. 5) 로마가 점령한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고대 이스라엘인의 후예이다. 6)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유대인은 강제로 추방당했다. 7) 현대 유대인은 로마가 추방한 고대 이스라엘인의 후예이다. 8) 오늘날 조상의 고향으로 귀환하는 것은 천부적인 권리이다. 9) 유대인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해 ‘하나의 민족’으로 존재했다.
20세기 이후 계속된 팔레스타인 지역의 고고학 연구와 발굴 결과 이곳에서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뚜렷한 역할을 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했다. 1997년 출판된 <고대 이스라엘의 발명>의 저자 키스 휘틀럼은 “고대 이스라엘인이 역사적 실체가 아니며, 유럽 국민 국가나 나아가 서양 근대 문명을 합리화하려는 학자들에 의해 발명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고대 이스라엘 국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고고학에 집중적으로 투자했지만, 팔레스타인 땅에 고대 이스라엘인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는지조차도 역시 의심스럽다.
1853년 7월 영국 정치가인 새프츠베리 경이 당시 영국 외무장관에게 보낸 서신에서 팔레스타인을 ‘민족 없는 땅, 땅 없는 민족’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땅에 대한 권리가 고대로부터 합법적으로 그 땅을 지배해오던 유대인에게 있다고 주장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지역을 비어있는 땅으로 규정하였다. 이후 새프츠베리의 이 문구는 United Presbyterian Magazine 등 장로교회 잡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면서 장로교의 폭 넓은 지지를 얻었다. 이후 영국 성공회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도 이 개념을 선호하며 19세기 후반에 ‘민족 없는 땅, 땅 없는 민족’이라는 문구가 영국과 미국의 대중에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볼 때 시온주의를 창안해 널리 유포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한 주체는 유대인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이며, 이를 팔레스타인에 실현 가능하게 만든 것도 대영제국이었다.
오스만제국을 해체하고 아랍국가 수립을 목표로 하는 (요르단과 이라크 왕국을 건설한) 하심 가문과 (사우디 왕국을 건설한) 사우드 가문을 비롯한 무슬림 세력은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를 건설하려는 영국 제국주의 세력이나 시온주의자와 협력했다. 1930년 사우디 초대 국왕 이븐 사우드는 “나는 가엾은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에게 팔레스타인을 넘겨주는데 반대하지 않는다고 영국 대표 퍼시 콕스 경에게 무수히 밝혔다. 나는 결코 영국의 명령을 어기지 않을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그가 이렇게 영국의 오스만제국 해체와 시온주의 정책에 적극 협력한 결과 1932년 사우디 왕국을 창건했다. 한편 히자즈 왕 샤리프 후세인의 아들 파이살 후세인은 파이살-와이즈만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벨푸어 선언을 지지하고 유대인의 대규모 팔레스타인 이주와 유대 정착촌 건설에 협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이 1950년에 제정한 귀환법은 ‘유대인’을 ‘유대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거나 유대교로 개종하고 다른 종교의 구성원이 아닌 사람’으로 규정한다. 귀환하는 유대인은 자동으로 이스라엘 시민이 되고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날 민족의 효력을 발생한다. 귀환법은 1970년 유대인의 자식과 증손, 유대인 자식의 배우자와 유대인 증손의 배우자에게까지 귀환권을 부여하는 것으로 확장 개정되었다.
세계 시온주의자 기구의 최고 입법부는 세계 시온주의자 의회(The World Zionist Congress)이다. 1897년 바젤에서 열린 제1차 시온주의자 의회 이후 1901년까지 매년 회의를 개최했으며 이후 이스라엘 국가 수립 이전까지 2년마다, 국가 수립 이후에는 4~5년에 한 번씩 예루살렘에서 정기회의를 개최한다.
1897년 1차 바젤 회의에서는 ‘팔레스타인 공법에 보장된 유대민족 고향 창설’을 강령으로 제시했다. 1901년 5차 회의에서는 바젤강령을 예루살렘 강령으로 대체했다. 예루살렘 강령에서는 ‘이스라엘 국가의 강화, 추방된 유대인 이주 지원, 유대민족 통합 촉진’을 위한 세칙을 제시하고 오스만제국 통치하의 팔레스타인 땅을 구매ㆍ개발하는 회사로 유대민족기금(Jewish National Fund)을 창설했다. 1968년 27차 회의에서는 ‘역사적 고향인 예레츠 이스라엘로 유대인 이주’를 강조하면서 ‘모든 곳에서 유대인 권리 보호’를 명시했다. 예레츠 이스라엘이란 1967년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불법 점령한 동예루살렘, 서안 및 가자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바로 이 불법점령지로 유대인을 이주시킨다는 뜻이다. 2004년 제시된 예루살렘 강령에서는 팔레스타인인을 배제하고 유대국가로 만들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2017년 현재 유대민족기금은 창설 이후 현재까지 이스라엘 땅을 개발하고 유대인과 유대인 고향 사이의 결속을 강화해 왔다. 또한 점령지 팔레스타인 영토에서 유대 식민촌 건설 사업과 이스라엘 내부 개발사업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유대민족기금은 1903년 항구도시 하이파에서 50에이커 땅을 구입하면서 최초로 팔레스타인 땅을 획득했다. 이곳은 1891년 유대 정착촌이 세워진 곳이다. 아랍 대반란 시기인 1936~1939년 사이에 유대민족기금은 구입한 땅에 밤새워가며 ‘망루와 말뚝 작전’을 시작했다. 당시 영국 위임통치 정부는 시온주의자의 새로운 정착촌 건설을 억제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랍반란에 맞서는 수단으로 ‘망루와 말뚝 작전’을 용인했다.
1948년 국가 수립 이후 이스라엘 정부는 아랍 부재지주의 땅을 유대민족기금에 팔기 시작했다. 부재지주의 땅 전체 3,500제곱킬로미터 중 1,100제곱킬로미터를 1,100만 파운드에 유대민족기금에 팔았고, 이 땅의 98.5%는 시골 땅이었다. 1950년 10월에 유대민족기금에 판 부재지주 소유 토지 1,271제곱킬로미터는 모두 시골 땅이었다. 결국 1950년 말경에 유대민족기금이 소유한 땅의 2/3 이상은 팔레스타인 부재지주, 즉 팔레스타인 난민의 땅이었다.
1950년 3월 제정된 부재자재산법은 유엔에서 팔레스타인 분할안이 의결된 1947년 11월 9일 현재 아랍국가의 시민이거나 아랍국가에 거주하던 사람과 팔레스타인이라 할지라도 본인의 거주지를 떠나있던 사람들은 이유를 불문하고 부재자로 분류했다. 부재자재산법에는 판매 거부권이 명시되어 있어 시골 땅은 이스라엘 정부나 유대민족기금에만 팔 수 있었다. 부재자재산법에 따르면 부재자의 재산은 그 재산의 점유자에게 귀속되며, 당시 재산 점유자들의 권리는 땅 소유자들의 권리와 같다. 점유자들은 전 재산을 이스라엘 정부에게 팔았고 이스라엘은 이로써 손쉽게 원주민 팔레스타인인의 재산권을 강탈했을 뿐 아니라 이들이 팔레스타인이나 본인의 집으로 귀환할 근거를 사실상 없애버렸다.
당시 영국에게 팔레스타인은 전략적으로 수에즈운하에 대한 잠재적인 위협을 막기 위한 전초기지였으며, 1934년 건설된 이라크 키르쿠크-팔레스타인 하이파 석유 파이프라인의 출구였고, 인도 등으로 가는 국제 항공노선의 중간 기착지였을 뿐 아니라 이라크로 가는 사막 자동차 도로의 출발점이었다.
2013년 이스라엘 정부가 기밀 해제한 공문서에 따르면 새로 수립하는 유대국가의 이름으로 팔레스타인, 시온, 이스라엘을 놓고 검토한 결과 그중 이스라엘을 선택하였다. 팔레스타인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땅에 건설될 아랍국가가 자신들의 이름으로 쓸 것이기 때문에, 시온이라는 이름은 아랍인이 사용하는 경멸적인 호칭이었기 때문에 배제한 것이다.
이스라엘 내각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독점권에 대한 정당성을 3천 년 전 유대 사원의 존재에서 찾고 있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알아크사 모스크가 있는 성전산(Temple Mount) 일부를 지탱하고 있는 서쪽 벽(통곡의 벽)이 예루살렘이 유대교 성지였고 기원전 10세기에 건설된 솔로몬 성전 터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인의 믿음은 1967년 전쟁의 승리를 신성화하는 과정에서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1968년 고고학 발굴 과정에서 가장 밑에 있는 돌들이 단지 기원전 1세기 로마 헤롯왕 시대의 것이라고 확인했다. 이 벽의 건축 연대가 기껏해야 기원전 1세기라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예루살렘에 유대 성전이 존재했는지 자체를 의심하고 있다. 팔레스타인 고고학자는 10세기에 건설되었다는 첫 번째 솔로몬 성전도 허구이고 6세기에 건설되었다는 두 번째 성전 역시 공상의 세계에나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