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과 맥주를 만들던 수도원이 학문의 메카가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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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손이 문명을 빚었다
와인과 맥주를 공부하다 보면 수도원(Monasterium)이라는 이름을 피해갈 수 없다. 프랑스 보르도의 포도밭에도, 벨기에의 트라피스트(Trappist) 맥주 양조장에도 수도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포도를 길러 와인을 만들고, 보리를 발아시켜 맥주를 끓였던 그들의 손끝에는 노동이 곧 기도였고, 양조는 신앙의 실천이었다. 그러나 수도원을 단순히 술을 만드는 종교 시설로만 이해한다면 이야기는 반쪽짜리가 된다.
와인과 맥주는 그들의 노동의 부산물일 뿐, 수도원은 유럽 문명 전체의 토대이자 오늘날의 학교와 대학 제도의 원형이었다. 그렇다면 수도원은 어떻게 시작되고, 어떻게 지금의 학교로 이어질 수 있었을까? 그 내용을 정리해 보았다.
수도원의 시작은 이집트였다
놀랍게도 수도원 운동의 출발지는 유럽이 아니라 이집트의 사막이었다. 그 이유는 역설적으로 ‘기독교가 공인되었기 때문’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고, 이어 380년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데살로니카 칙령으로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국교로 선포했다.
그러자 뜻밖의 현상이 일어났다. 오랜 세월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온 사람들에게 신앙생활이 갑자기 ‘너무 쉬워진’ 것이다. 예배는 제도화되었고, 교회는 부와 권력을 얻게 되었다. 그 결과, 신앙의 순수성을 잃었다고 느낀 이들이 나타났다.
그들은 도시와 제도를 떠나 광야로 나아갔다. 세속의 안락함 대신 다시 고난과 절제를 택하며, 오로지 기도와 노동으로 신앙을 지키려 했다. 이렇게 탄생한 이들이 바로 초기 수도자들, 즉 ‘사막의 수도사들(Desert Fathers)’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이집트는 기독교인이 더 많았다. 아직 이슬람화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집트로 떠난 유럽의 신앙인
세속의 혼란 속에서 일부 신앙인들은 도시를 떠나 사막으로 향했다. 그중 한 사람이 바로 성 안토니우스(Antonius, Anthony the Great)였다. 그는 나일강 동쪽 사막의 동굴로 들어가 평생을 기도와 금식으로 보냈다.
그의 삶은 도시의 탐욕과 단절한 ‘은둔(Anchoritism)’의 상징이 되었지만, 혼자 사는 수도생활은 고립과 위험을 동반했다. 병이 나면 돌봐줄 이가 없었고, 식량을 구하지 못하면 굶주림 속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래서 은수자들 중 일부는 함께 모여 공동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세계 최초의 공동생활 수도원
그 이상을 실현한 인물이 이집트 테베 출신의 파코미우스(Pachomius)였다. 그는 로마 군대 복무 중 기독교인의 자비에 감동해 개종했고, 사막의 은수생활 끝에 “혼자보다 함께 사는 믿음이 더 견고하다”는 확신을 얻었다. 그는 타베나 수도원을 세우며 세계 최초의 공동생활 수도원(Coenobium)을 조직했다.
그가 세운 ‘파코미우스 규칙(Regula Pachomii)’은 하루의 기도·노동·식사·독서·휴식 시간을 세밀히 구분한 최초의 규율이었다. 이 규칙이 바로 오늘날 학교의 시간표와 생활 규정의 원형이다. 수도사들은 하루 여덟 번의 종소리에 맞춰 생활했고, 일정 시간 독서와 필사, 노동을 병행했다. 시간은 신의 질서였고, 규율은 공동체의 문법이었다.
로마 제국의 중심이 동방으로 옮겨지자 수도원의 전통도 지중해를 건너 서방으로 퍼졌다. 이 흐름의 연결자였던 인물이 요한 카시아누스(John Cassian, Ioannes Cassianus)다.
그는 루마니아 도브루자 지방에서 태어나, 이집트 수도사들에게서 직접 수련을 받은 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로 건너가 수도원을 세웠다. 그의 저서 『수도생활의 제도(De Institutis Coenobiorum)』와 『담화집(Collationes Patrum)』은 동방 수도 전통을 서방 세계에 체계적으로 소개한 문헌이었다.
카시아누스는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교육자였다. 그의 수도원은 문자 해독, 필사, 독서, 묵상을 병행하는 지적 공동체였다. 수도사에게 ‘배움’은 신앙의 일부였다. 그가 세운 수도원학교(Schola Monastica)는 교회 이전에 이미 ‘학교’의 기능을 수행했다.
유럽 수도원의 근간 베네딕트회의 시작 - 기도하며 일하라
이 흐름을 완성한 인물은 성 베네딕트(Benedictus de Nursia, 약 480~547)였다.
6세기 초, 그는 타락한 로마의 도성을 떠나 이탈리아 중부 라치오 지방의 산악지대, 수비아코(Subiaco)의 동굴로 들어갔다. 로마에서 동쪽으로 약 70km 떨어진 이곳에서 그는 세속을 끊고 기도와 절제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나 그의 덕망에 감화된 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자, 베네딕트는 그들을 이끌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후 그는 남쪽으로 약 130km 떨어진 몬테카시노(Monte Cassino) 산으로 옮겨 수도원을 세웠다. 오늘날 나폴리 북쪽, 카시노(Cassino) 마을 위 언덕에 자리한 이 수도원은 529년경 완공되었으며, 서방 수도생활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곳이 바로 훗날 베네딕트회(Order of Saint Benedict)의 출발점이다.
베네딕트가 남긴 『베네딕트 규칙(Regula Benedicti)』은 수도원 생활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 정신은 “기도하라, 그리고 일하라(Ora et Labora)”로 요약된다. 이 문장은 규칙서에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그가 제시한 균형 잡힌 수도생활의 핵심을 가장 잘 압축한 말이다.
베네딕트는 노동을 죄의 속죄가 아닌 신앙의 실천으로 보았다. 손끝의 움직임이 곧 기도였고, 흙을 일구거나 책을 옮겨 적는 일이 모두 신에게 바치는 봉헌이었다.
이 정신을 따르는 수도사들은 농사와 양조, 필사와 교육을 병행하며 자급자족의 공동체를 이루었다. 이렇게 베네딕트 규칙을 따르는 수도원들이 유럽 곳곳으로 퍼져나가면서 ‘베네딕트회’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이것이 유럽 수도회의 뿌리가 되었다.
훗날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근면과 절제, 검소함을 중시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서양 자본주의의 토대가 되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그 사상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베네딕트가 제시한 ‘노동의 신성화’가 있었다.
수도원의 밭과 양조장, 필사실에서 흘린 수도사들의 땀방울은 단순한 생계의 노력이 아니라 신을 향한 헌신이었다. 그들의 손끝에서 노동은 예배가 되었고, 그 정신은 세속으로 흘러들어 서구 근대의 근면정신과 경제윤리의 씨앗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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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문명을 구했다.
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서유럽은 문자와 제도가 붕괴한 암흑기를 맞았다. 도시가 사라지고 행정이 무너진 자리에서 문명은 사막처럼 메말라갔다. 그러나 수도원은 남았다. 수도원은 세속을 떠난 공간이 아니라, 세속 문명을 지탱한 마지막 보루였다.
또 포교가 필요한 척박한 곳, 아직 기독교를 믿지 않는 바이킹과 게르만족에게 수도원은 선교의 전진기지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 먼저 수도원을 세우고, 교육과 복지, 복음을 함께 전파했다. 이후 8세기 말, 프랑크 왕국의 황제 카를루스 대제가 등장하면서 수도원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대국면을 맞이한 카룰루스 대제의 르네상스
그는 수도원을 단순한 기도의 집이 아니라, 제국의 학문과 행정의 중심으로 재편했다. 오늘날 ‘카롤링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 부흥은 사실상 수도원에서 시작되었다. 황제는 제국 전역의 수도원에 학교를 세우고,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 천문학, 성경 필사를 가르치게 했다.
투르(Tours)의 수도사 알쿠인(Alcuin of York)은 황제의 고문으로서 베네딕트 규율을 학문 체계로 바꾸었고, 수도원의 필사실에서는 성경뿐 아니라 플라톤과 키케로, 세네카의 저작이 베껴졌다. 고대의 지식이 중세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시기 수도원 덕분이었다. 수도원은 제국의 행정문서와 고전을 보존한 ‘지식의 창고’이자 ‘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카를루스 대제의 개혁 덕분에 유럽의 수도사들은 단순한 신앙인이 아니라 문명 관리자가 되었다.
수도사들이 똑똑했던 이유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 자체가 우수한 인재였기 때문이다. 수도원의 필사실(Scriptorium)에서는 수도사들이 고대 그리스·로마의 책을 베껴 썼다. 수도사들은 단순한 필사자(Scribe)가 아니라 지식의 관리자였다. 우리가 오늘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와 세네카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수도원의 서고 덕분이다. 수도사는 신의 말씀뿐 아니라 인간의 지혜를 보존했다.
또한 수도원은 사회의 복지 기관이었다. 병자를 돌보는 병원(Hospitium), 빈민을 구제하는 구호소(Almonry), 여행자를 위한 숙소(Hospitium Monasticum)가 모두 수도원 안에 있었다. 수도원은 오늘날의 병원·복지관·학교의 원형이었다.
경제적으로도 수도원은 자급자족의 모델이었다.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일구고, 밀을 갈고, 치즈를 만들며, 맥주를 양조했다. 벨기에의 트라피스트 수도회는 자급을 위한 부업으로 맥주를 만들었지만, 그 결과는 유럽의 양조문화를 낳았다. 수도원은 중세 유럽의 첫 번째 기업이자, 첫 번째 대학이었으며, 첫 번째 농업연구소였다.
수많은 황제, 왕, 귀족 들이 전쟁에서 흘린 피를 씼고자 기부 및 헌금을 냈다. 그것이 수도원 경제의 뒷받침이 되었다. 무엇보다 교황 직속의 수도원이 있던 부르고뉴는 최고의 와인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교황의 직속 수도원, 최고의 와인 생산지 부르고뉴의 클뤼니 수도원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교회 및 수도원이 너무나도 세속 정치와 연결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라는 기도도, 성경 필사도 게을러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세속정치와 연관이 없는 완벽한 독립체의 수도원이 탄생하게 된다.
10세기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클뤼니 수도원(Cluny)이라는 곳이다. 이곳은 교황 직속이라는 독특한 지위를 얻었다. 세속 권력의 간섭을 받지 않고, 오로지 예배와 전례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권위와 부는 점차 사치로 변질됐다. 11세기 후반, 클뤼니 수도회의 부패는 신앙의 본질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 디종 근처의 시토 수도원(Cîteaux)에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다. 그들이 바로 치스테르회(Cistercienses)다.
이 수도회는 단순함과 노동을 신앙의 중심으로 되돌렸다. 그 개혁을 주도한 인물이 성 베르나르(Bernardus Claraevallensis, Bernard of Clairvaux)였다.
그는 유럽 전역을 돌며 설교하고, 황무지를 개간하며, 제방과 제분소를 세웠다. 치스테르회는 중세 농업혁명의 실질적 주체였다. 그리고 와인을 만들었다.
세계 최고가 로마네 꽁띠가 있는 부르고뉴 와인의 본산지이다.
오늘날의 대학(University) 어원
그들의 경제적 효율성과 조직력은 세속 사회에도 영향을 주었다. 수도원은 단순한 종교기관이 아니라 행정, 생산, 연구, 교육의 복합체였다. 그들이 쌓아 올린 질서(Regula)는 이후 학교의 제도로 이식되었다.
12세기 이후, 수도원과 대성당은 새로운 변화를 맞는다. 성경 해석과 신학 토론을 중심으로 하던 교육이 점차 논리학과 철학으로 확장되었다. 파리, 볼로냐, 옥스퍼드, 케임브리지 등의 대성당학교(Schola Cathedrae)는 점차 학문 공동체로 발전했다.
이 공동체가 바로 유니베르시타스(Universitas)였다.
Universitas란 “전체, 혹은 통합된 공동체”라는 뜻의 라틴어로, 오늘날의 대학(University) 어원의 출발점이다. 수도원의 배움이 세속의 학문으로 전환된 순간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대학을 인정하다
유럽 최초의 대학은 115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에게 공인받은 이탈리아 볼로냐 대학교다. 이 공인 행위는 단순한 학교 인정 이상의 의미를 지녔는데, 이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교육 기관에 법적 지위와 특권을 부여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대학은 오늘날의 캠퍼스나 건물의 개념과는 달랐다. '대학(Universitas)'이라는 단어는 특정 목표를 가진 사람들의 조합(guild)을 의미했다. 이는 곧 교수와 학생들이 모여 지식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율적인 공동체를 뜻했다.
중세 대학은 국가나 교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갖췄다. 기존의 수도원 부속 학교와 달리, 신학, 법학, 의학 등 전문적인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쳤다. 또한, 교수와 학생에게 자체적인 재판권을 부여하여 외부 권력의 간섭 없이 학문을 추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자율성은 대학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였다.
입학 방식과 평가 체계 역시 오늘날과는 달랐다. 엄밀한 의미의 입시 시험은 없었지만, 학생들은 입학 전 라틴어 구사 능력과 재정적 지원이라는 두 가지 필수 조건을 갖춰야 했다. 모든 강의와 교재가 라틴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는 학문 공동체에 참여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자격이었다. 학생의 학업 성취도는 필기시험이 아닌 구두 변론이나 공개 토론을 통해 평가되었으며, 이 과정을 통과해야만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황제가 대학을 공인한 이유
프리드리히 1세가 대학을 인정한 것은 순수한 교육적 목적을 넘어선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필요성 때문이었다.
당시 볼로냐 대학교는 로마법 연구의 중심지였다. 황제는 제국의 통치와 질서 유지를 위해 유능한 법률 전문가가 필요했고, 대학을 공인함으로써 이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려 했다. 이는 황제의 권위를 강화하고 제국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하는 행위였다. 즉, 황제는 대학을 자신의 통치에 필요한 인재를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파리, 옥스포드,케임브리지 대학도 수도원에서
12세기 초,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부속 학교에는 수도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성서를 해석하고,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신앙과 연결하려 했다. 이것이 훗날 파리 대학(Université de Paris)의 시초가 된다.
파리 대학은 베네딕트회와 시토회 수도사들이 운영했고, 신학부는 중세 유럽의 중심이 되었다. 토마스 아퀴나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같은 신학자들이 이곳에서 가르쳤다.
당시 사람들은 파리를 ‘유럽의 두뇌’라 불렀다. 각국의 수도사와 학자들이 이곳으로 와서 배우고, 다시 자신들의 수도원과 도시에 학교를 세웠기 때문이다.
파리 대학은 단순한 학문 기관이 아니었다. 수도원에서 길러진 지적 영성이 세속의 도시로 옮겨온 첫 사례였다. 그 결과, ‘신의 질서’와 ‘인간의 이성’을 결합한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이 태어났다.
즉, 파리는 수도원의 사유가 도시의 학문으로 전환된 최초의 실험장이었다.
영국의 옥스퍼드는 12세기 수도원 부속 학교에서 출발했다. 처음엔 수도사와 성직자들이 성경을 가르치던 곳이었지만, 곧 일반 학자들이 모여들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학교가 되었다.
옥스퍼드의 칼리지(College)들은 수도원 공동체의 구조를 그대로 따랐다. 하나의 칼리지는 작은 수도원처럼, 교회와 식당, 기숙사, 정원을 갖췄다. 기도 시간과 식사 시간, 독서와 묵상, 토론의 규율은 수도원의 일과표에서 왔다.
이처럼 옥스퍼드의 학문은 개인의 탐구가 아니라 공동체의 대화에서 태어났다. 학생들은 ‘스승과 제자의 토론’을 통해 진리를 찾았고, 이는 베네딕트회의 공동 연구 전통과 닮아 있었다. 오늘날까지 옥스퍼드가 유지하는 튜토리얼(tutorial) 제도, 즉 일대일 토론식 교육은 바로 이 수도원적 학습법의 흔적이다.
13세기 초, 옥스퍼드의 일부 학자들이 왕과 교황의 갈등을 피해 떠나 세운 곳이 바로 케임브리지(Cambridge)였다. 케임브리지는 강변의 작은 수도원촌이었다. 강(Cam) 주변에 자리한 성 메리 교회와 여러 수도원들이 학자들의 거처가 되었고, 자연스레 학교가 세워졌다.
초기의 케임브리지는 수도원적 도시였다. 각 칼리지의 정원과 회랑(cloister), 식당과 채플은 모두 수도원의 구조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지식은 신의 은총이자 수행의 결과였고, 공부는 노동과 기도처럼 하루의 의무였다.
이곳의 학문은 신학에서 출발했지만, 점차 수학과 천문, 철학으로 확장되었다. 수도원적 규율 위에 합리적 탐구가 더해지며, 근대적 학문의 싹이 자라난 것이다. 훗날 뉴턴이 태어나 과학 혁명을 이끈 것도 바로 이 전통 위에서였다.
수도원 언어가 학교의 언어가 되다
그래서 오늘날 학교 용어의 상당수는 수도원 라틴어에서 나왔다.
Professor는 수도사가 ‘서약한다’는 뜻의 professio에서 왔고,
Lecture는 성경을 낭독한다는 lectio에서,
Degree는 수도사의 단계(gradus)에서,
Discipline은 수도원 규칙(Regula Disciplinae)에서,
Campus는 원래 군영과 수도원 중정의 훈련장을 뜻했고,
Alma Mater는 “영혼을 기르는 어머니”, 즉 교회를 비유한 표현이었다.
학교의 종은 수도원의 종이었다
오늘날 학교의 구조는 수도원의 질서를 거의 그대로 이어받았다. 수도사들은 하루를 ‘기도의 시간’과 ‘노동의 시간’으로 나누었고, 종소리에 맞춰 움직였다. 학교의 종(鐘)도 이 전통의 연장이다.
아침 종(Bell)은 기도의 시작을 알리던 Matutinum에서,
점심 종은 Sexta의 식사 시간에서,
하교 종은 저녁기도 Vespera에서 유래했다.
수도원의 하루 일정표는 오늘날의 시간표(Timetable)와 유사했고, 수도 규칙(Regula)은 학교의 학칙으로 변했다. 수도사들의 공동식사는 급식 제도로 이어졌고, 필사실은 도서관으로, 독서시간은 수업으로 전환되었다.
수도원장은 Abbas라 불렸고, 이는 훗날 학교의 교장(Principal)이나 학장(Dean)으로 이어진다.
Decanus(열 명의 수도사를 관리하는 직책)는 오늘날 ‘학장(Dean)’의 어원이며, Cancellarius(교회 행정 책임자)는 ‘총장(Chancellor)’의 기원이 되었다.
수도원의 복장은 교복(Uniform)과 학위복(Academic Dress)으로 발전했다. 베네딕트 수도회의 검은 수도복은 학문과 절제의 상징이 되었고, 오늘날 학사복의 검은색은 바로 그 상징의 세속화된 잔재다.
군사적 질서의 결합 – 학교의 또 다른 기원
학교가 수도원의 질서를 계승한 동시에, 군대의 규율 또한 받아들였다는 점은 흥미롭다.
수도원은 절제의 공동체였지만, 근대 국가가 등장하면서 학교는 ‘훈련의 공간’으로 재편되었다.
특히 18세기 프로이센(Preußen)의 교육개혁은 군사조직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프리드리히 2세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국민을 동일한 질서 아래 교육시키는 체제를 구축했다.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복장을 입고, 명령에 따라 행동하는’ 체계는 수도원과 군대의 공통된 질서였다. 19세기 말 일본의 메이지 정부가 이 프로이센식 학교 제도를 도입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교육제도에도 ‘군사적 질서’가 결합되었다. 줄 맞춰 운동을 하고, 일제히 인사를 하며, 종소리에 따라 행동하는 학교의 모습은 수도원의 규율 위에 군사조직의 명령체계가 덧입혀진 결과였다.
즉, 초·중·고등학교는 수도원의 공동생활과 군대의 훈련 시스템이 결합된 형태였다.
대학이 수도원의 자유로운 탐구 정신을 이어받았다면, 초중등 교육은 규율과 복종을 통한 사회화의 공간이 된 셈이다.
수도사에게도 ‘학년’이 있었다.
수도사에게도 ‘학년’이 있었다. 신입 수도사는 Postulans(지원자), 그다음 단계는 Novicius(수련 수도사), 마지막으로 Professus(서원 수도사)였다. 수련기간 동안 수도사는 기도와 노동, 필사와 독서, 침묵과 묵상의 훈련을 받았다. 이 단계는 근대 이후 학교의 학제 구조에 그대로 반영된다.
초등 교육(Elementary School)은 기초 독서와 필사를 중심으로 한 수도원의 초심자 교육과 유사했고,
중등 교육(Secondary School)은 논리·음악·문법·산술의 훈련, 즉 고대의 ‘트리비움(Trivium)’과 ‘콰드리비움(Quadrivium)’의 계승이었다.
대학(University)은 수도원의 최종 과정인 Studium Generale에 해당했다.
이곳에서 신학(Theologia), 철학(Philosophia), 법학(Iurisprudentia), 의학(Medicina)이 가르쳐졌다.
오늘날의 ‘6-3-3-4’ 체계는 인간 발달에 따른 단계적 수련이라는 수도원적 관점의 세속화로 해석할 수 있다.
수도원이 인간의 영혼을 다듬는 단계적 수련장이었다면, 학교는 인간의 지성을 다듬는 제도적 수련장이 된 것이다.
수도원 복장의 상징과 학문의 권위
중세 수도사들은 복장을 통해 신분과 역할을 구분했다. 베네딕트회는 검정색, 치스테르회는 흰색, 도미니코회는 흑백, 프란체스코회는 갈색 수도복을 입었다. 이 색의 구분은 학위복의 컬러 코드로 이어진다.
신학은 보라, 법학은 붉은색, 의학은 녹색, 철학은 파란색 등으로 나뉜다. 각 학문의 상징색이 생긴 이유는 바로 수도원의 제의복에서 비롯된 것이다.
학사모(Mortarboard)는 중세 성직자의 사각모 Biretta에서 발전했으며, 네모난 상판은 ‘성서를 올려놓는 책상’을 상징한다.
끈(Tassel)은 수도복 후드의 매듭을 상징하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옮기는 동작은 ‘배움의 완성’을 의미했다.
졸업식의 복장은 단순한 전통이 아니라, 수도원의 서약식(Liturgia Professionis)을 세속적으로 계승한 의례였다.
언어와 상징의 유산
라틴어 단어 Schola(학교)는 본래 ‘한가로운 시간’을 뜻했다.즉, 생존 노동에서 벗어나 사유에 전념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학교의 본질이었다. 이는 수도원이 추구한 이상과 동일했다.
Universitas는 전체, Collegium은 함께 거주하는 공동체, Discipulus(학생)는 규율(Discipline)을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이 모든 어원은 ‘함께 배운다’는 공동체적 가치에서 비롯되었다.
배움이란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원이었다.
수도사들이 신의 뜻을 이해하기 위해 글을 배웠듯, 학생은 세상의 질서를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배운다.
수도원의 침묵이 학교의 종소리로
로마 제국이 붕괴했을 때에도 수도원은 살아남았다. 전쟁과 역병 속에서도 수도사들은 글을 베껴 쓰고, 노래를 부르고, 포도를 재배하고 와인과 맥주를 만들었다. 그들의 침묵은 문명을 지키는 시간이었다. 말을 아꼈지만 언어를 지켰고, 재산을 버렸지만 경제를 유지했다.
학교 역시 그 전통을 잇는다.
조용한 교실, 정해진 시간표, 공동생활, 그리고 평가의 질서.
이것은 모두 수도원의 삶이 세속으로 옮겨온 모습이다.
수도원장이 교장이 되고, 서원식이 졸업식이 되며, 기도가 학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학교는 현대의 수도원일지도
결국 학교는 현대의 수도원을 추구했다고도 볼 수 있다. 수도원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대학도, 병원도, 도서관은 다른 모습으로 존재했을 것이다.
그들의 규율은 사회의 질서가 되었고, 그들의 시간표는 교육의 리듬이 되었다. 수도사의 서원(Oath)은 학생의 졸업 선서로, 수도원의 침묵은 교실의 정숙함으로 바뀌었다.
술을 공부하다가 수도원이 궁금해졌지만, 이미 그곳에 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종소리에 맞춰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공부하며, 야간 자율학습에서 공동생활을 하고, 교칙을 어기면 벌점을 받던 학창시절—그곳이 바로 세속의 수도원, 현대의 수도원이었다.
나가고 싶어도 나갈 수 없었던 그 금욕의 시간 속, 그 침묵과 규율, 공동체의 기억 속에 수도원의 문화가 흐르고 있다.
수도원이 궁금하다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라.
종소리와 규율, 시간표와 식사, 시험과 졸업식 속에 그들의 문화가 녹여져있다.
관련 출처
The Rule of Saint Benedict (English Translation)
https://www.gutenberg.org/files/50040/50040-h/50040-h.htm
Regula Benedicti – English Text & Commentary
https://archive.osb.org/rb/index.html
Documenta Catholica Omnia – The Holy Rule of St. Benedict (PDF)
https://www.documentacatholicaomnia.eu/03d/0480-0547%2C_Benedictus_Nursinus%2C_Regola%2C_EN.pdf
Latin Original Text – The Rule of St. Benedict
https://www.thelatinlibrary.com/benedict.html
History of the Abbey of Cluny (Official Site)
https://www.cluny-abbaye.fr/en/discover/history-of-the-abbey-of-cluny
Cluny Abbey – Britannica
https://www.britannica.com/place/Cluny-France
Cluny Abbey – Smarthistory
https://smarthistory.org/cluny-abbey/
Why Was Cluny Abbey Once the Heart of Western Christendom? – The Collector
https://www.thecollector.com/cluny-abbey-heart-western-christend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