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에 없던 장기체류
아직 밴쿠버에서 출항 준비에 한창이던 며칠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출항 날짜를 정하니 그제야 일주일 넘게 집으로 쓰던 배의 '기동성'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항해 수첩 첫 장에 호라이즌스 호의 길이, 너비 등 치수를 적었다. 물탱크와 연료탱크 용량, 닻, 그리고 엔진 정보도 추가해 언제라도 금방 찾아볼 수 있게 했다. 인터넷에서 타야나 37 매뉴얼도 찾아 읽어 보았다.
밴쿠버 오기 직전 이탈리아에서의 인생 첫 스키퍼 경험은 내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크루즈 내내 나는 동승한 해적 일당의 두목 격인 시칠리아 녀석과 끊임없이 충돌했다. 코르시카에서 한번 항해해 보고 싶어 크루 지원을 한 놈이었지만, 시칠리아에 배가 있는 베테랑 선주였다. 그놈은 자기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배에 대한 지식을 앞세워 스키퍼인 나보다 우위에 서려했다. 안전보다 안락함을 우선시하는 성향이 나와 정말 맞지 않았지만, 요트 시스템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 효과적으로 반박하기가 어려웠다. 스키퍼 보조일 때는 몰랐지만, 막상 스키퍼가 되고 보니 혼자서는 제대로 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그제야 나는 그동안 배 시스템에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아마 이번에 타야나 37 매뉴얼을 읽으면서도 엔진 부분은 또다시 건너뛰었을 게 뻔하다.
시동을 걸 때마다 보였지만, 무지의 장막에 가려 인식하지 못했던 게이지들이 있었다. 매뉴얼을 읽은 뒤에야 그 존재들이 인식의 틀 안으로 들어왔다. 엔진 냉각수 온도와 오일 압력을 모니터링하는 용도였음을 알게 됐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사람이 한글 간판을 처음 읽고 그 뜻을 이해했을 때 이런 느낌일까.
호라이즌스 호는 바닷물을 끌어와 순환시키며 엔진을 냉각하는데, 엔진 온도가 높으면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냉각수의 원리는 직관적이었지만, 엔진 오일이 금속끼리의 마찰을 줄이는 윤활 작용을 한다는 것은 매뉴얼을 읽고 나서야 알았다. 요트는 물론이고 자동차조차 소유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내 엔진 지식의 부재는 독보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매뉴얼에 따르면 적절한 엔진 오일 압력은 30 - 60 psi 사이. 이 수치를 모니터링하라고 게이지를 잘 보이는 곳에 설치했을 것이다.
잘못 부은 부동액을 헹구려다 엔진 오일을 지나치게 많이 넣어버렸을 때, 이렇게 미리 읽어 둔 매뉴얼 덕에 오일 압력 게이지를 눈여겨볼 수 있었다. 드디어 엔진 문맹에서 벗어나 낫 놓고 기역자가 보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엔진 오일 튜브를 흔들고 비비고 돌리며 간신히 오일 눈금을 상한선까지 줄이고 엔진 시동을 했을 때 게이지 눈금은 60 psi였다. 적정 압력 구간의 최대치. 그러다 항해중 어느 순간엔 눈금이 50 psi로 줄어 있었다. 엔진 오일 빼내는 게 워낙 고생스러웠던 데에다 최대 눈금이 넘을까 아슬아슬하던 참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오늘 포트 앤젤레스에 거의 다 와서 봤을 때는 눈금이 40 psi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젠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우리 엔진이 디젤 대신 엔진 오일을 연료로 쓰기라도 하는 것인가.
"우리 차 한잔 마시자"
국경심사 뒤, 주유 선착장에서 배가 계속 시동이 걸리지 않자, 선주는 실내로 내려가 차를 끓였다. 둘 다 심호흡을 하고 차를 마시며 마음을 가라앉힌 뒤 엔진 키를 한번 더 돌려봤다.
부르르르르릉-
엔진 시동이 걸렸다! 이제 어서 배를 마리나 선착장으로 옮겨야 했다. 이 엔진이 꺼지기 전에...
100미터쯤 떨어진 마리나 선착장에 배를 묶자마자, 선주는 아래 내려가 엔진룸을 열어 보더니, 콕핏으로 머리를 내밀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엔진 오일 밸브가 열려 있었어.."
전날 아침, 엔진 오일을 간신히 빼낸 뒤에 펌프 밸브 잠그는 것을 잊었던 것이다. 엔진 오일은 이틀의 항해 동안 계속해서 흘러나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늘 아침 시드니 스핏에서 닻을 올리기 전에 평소의 루틴대로 엔진 체크를 했다면 이 실수를 제 때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날의 실수에 대한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선주는 '내가 괜히 엔진 체크를 매일 한다고 오버하다가 이 난리가 났다'며 엔진 체크를 거부했었다. 그 결과, 엔진 오일은 포트 앤젤레스까지 35마일을 항해하는 동안 흘러나갔고, 엔진은 윤활유 없이 돌아갔던 것이다.
좀 이르긴 하지만 한국은 이제 아침이 되었으니 얼른 한국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이제 호라이즌스 호의 공식 기술 고문이 되었다. '엔진 오일이 전혀 없었으니 기계끼리 붙어 버렸을지 모른다'며 깊은 한숨을 쉬더니 일단 도구를 이용해 크랭크를 힘으로 한번 돌려 보라고 했다. 다행히 크랭크는 돌아갔고,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연료 필터가 더러울 때 출력이 떨어지고 공기 방울이 들어가면 시동이 걸리지 않을 수 있다 하여 블리딩을 해 보기로 했다. 어쩌면 부동액을 잘못 부었던 후유증일 수도 있었다.
블리딩(bleeding) : 원래 '피 흘리다'라는 뜻이지만 디젤 엔진의 연료 시스템에서 공기를 빼 주는 작업을 말한다. 연료에 공기가 섞여 있으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밸브를 열고 모든 공기방울이 제거될 때까지 수동으로 연료를 펌핑한다.
대대로 원주민들이 잘 살고 있던 이곳에 1700년대 후반, 웬 스페인 탐험가 하나가 상륙하더니,
"이곳을 '천사들의 성모 항구(Puerto de Nuestra Señora de los Ángeles)'라 명명하노라"라고 제멋대로 선언했다.
이후 이 지역 인싸가 영어권 주민들로 바뀌면서 이 도시는 포트 앤젤레스(Port Angele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캐나다와 미국을 가르는, 강처럼 긴 바다 후앙 데 푸카(Juan de Fuca)의 동쪽 끝에 위치해서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오는 배들의 관문 역할을 하는 국경도시이다.
포트 앤젤레스는 다른 워싱턴 주의 도시들보다 맑은 날이 많은 '지중해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포트 앤젤레스 날씨를 설명하는 데 적절하지 않은 전문용어인 것 같다. 지중해에서 건너온 나는 수영복만 세 벌을 챙겨 왔으나, 8월 한여름에 오리털 파카를 입어야 하는 날이 벗을 수 있는 날보다 많았다. 샌들에 크롭탑 따위를 가방에 넣어 온 죄값으로, 포트 앤젤레스에 도착한 이후 나보다 키가 15센티미터나 큰 선주의 옷을 입고 다녀야 했다.
포트 앤젤레스 다운타운은 마리나에서 20분가량 걸어야 닿을 수 있는데, 두 개의 큰길을 따라 상권이 형성돼 있다. 해안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해산물 요리는 자취를 찾을 수 없고, 피시 앤 칩스와 햄버거가 주 메뉴이다. 페리 터미널 근처에는 바다가 보이는 식당이 많은데, 가장 좋아하는 곳은 피자와 수제 맥주를 파는 집이다. 피자헛, 도미노 같은 미국식 피자가 아니라 이탈리아 피자가 나오는데 기대 이상으로 맛있다. 후앙 데 푸카가 한눈에 들어오는 야외 테이블도 좋고, 실내 분위기도 상당히 이국적이다.
분당 같은 곳에 있을법한 바와 크게 차이가 없어 보이던 밴쿠버 바와 달리 이 동네엔 '내가 미국에 있구나'라는 느낌을 주는 특색 있는 바들이 많다. 라이브 공연도 꽤 하는데, 대부분 음악은 형편없지만 앞에 나가 춤추는 관객들은 항상 있다. 선주 말에 , 이곳은 미국 시골의 매력이 넘치는 곳이라고 한다.
소수의 아메리카 원주민을 제외하고는 온통 백인이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친절했고, 어리버리한 동양인 두 명을 도와주려는 데 진심인 것 같았다. 버스 종점에 내려서 정류장 벤치에 앉으려니 운전수가 "어디까지 가야 하는데요?"라고 물어 주고, 산책을 하는데 마주 오던 웬 할아버지가 난데없이 "히피의 부인을 뭐라고 부를까요?" 하고 갑자기 수수께끼를 던지기도 했다. (궁금한 독자를 위해, 답은 '미시시피 Mrs. Hippie'이다.)
포트 앤젤레스의 해지기 직전 하늘은 언제나 감동인데, 저녁 무렵 해안을 따라 난 산책로를 달리면서는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참 아름다운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최고의 뷰 포인트는 페리 터미널 바로 옆의 시립 선착장이다. 초저녁의 주황색 빛으로 가득한 나무 재질의 선착장에 잔잔한 후앙 데 푸카의 전경을 배경으로 게 덫을 가지고 놀며 신난 관광객들을 보고 있기만 해도 따뜻한 감정이 밀려온다.
배 타고 지나가는 여행객이 포트 앤젤레스를 어떻게 이렇게 잘 알게 되었는지 궁금할 수 있다. 오늘이 포트 앤젤레스에 도착한 지 2주째다. 엔진은 아직 회생의 기미가 없어 보인다.
선주는 블리딩 뒤 엔진을 살려낸 경험이 수 차례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기대를 안고 정성껏 블리딩을 했다.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이유가 디젤 연료에 섞인 공기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모든 필터를 교체하고 아무리 블리딩을 해도 차도가 보이지 않자, 스타터 모터로 눈을 돌렸다. 예전부터 심심찮게 접촉 불량 문제를 일으키던 녀석이라고 했다. 밴쿠버에서도 접촉 부분을 갈아 내고서야 시동이 걸렸다고 하니, 어쩌면 범인이 스타터 모터일 가능성도 있었다.
이 배의 놀라운 점이라면, 문고리 하나부터 스타터 모터까지 모든 부품에 예비 부품이 있다는 점이었다. (여분의 엔진이 하나 더 없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과연, 오프쇼어 항해 준비가 된 배 같아 보였다. 하지만, 예비 부품이 있더라도, 고장 난 스타터 모터를 제거하고 새 모터를 엔진에 부착하는 작업 자체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실내 입구 계단 밑에 위치한 엔진은 계단을 올리고 엔진룸 덮개를 들어내면 앞쪽에서 접근이 가능하다. 배꼬리 선실 벽의 개구멍을 통하면 엔진 뒤쪽도 접근이 가능하다. 하지만 스타터 모터는 하필 엔진의 측면에, 그것도 각종 금속 튜브들 안쪽에 위치해 있어, 손이 잘 닿지도 않는 데다가 놀랍게 무겁기까지 했다. 나는 개처럼 엎드려 바닥에 댄 얼굴로 체중을 지지하고, 요가하듯 조심스레 팔을 뻗어 스타터 모터의 나사를 제거했다. 새 모터를 장착하고 일어나 보니 팔뚝이 온통 기름때로 까맣게 되었다. 이제 시동키를 돌리고 스위치를 누르면 크랭크는 실패 없이 돌아갔다. 그러나 시동은 걸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힘들게 스타터 모터를 교체한 뒤 기대에 차 있었는데, 실망도 이런 실망이 없었다.
고문으로부터 '부란자'를 체크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정확한 용어로는 인젝션 펌프Injection pump인데, 엔진의 인젝터로 디젤 연료를 밀어 넣어 주는 장치이다. 엔진의 점화를 도와준다는 스프레이도 써 보았다. 이 스프레이를 팔던 자동차 샵에서 '디젤 엔진에는 사용하면 안 된다'라고 경고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 에어 필터를 열고 뿌려 봤다. 그러나 시동은 안 걸리고 기계가 무섭게 부딪치는 굉음이 나서 가슴만 철렁했다. 블리딩도 몇 번이고 다시 해 봤다.
일주일간 매일 고군분투했고 매일 실패했지만, 저녁이 다가오면 니트릴 장갑을 벗어던지고 일어나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고 크랭크만 돌아가는 특유의 메마른 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떠나지 않았지만, 맛있는 저녁을 먹고 바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게까지 여는 슈퍼마켓에서 산책을 하기도 했다. 이제 별수 없이 전문가를 불러야 할 때가 온 것 같았다.
맛있는 식당을 몇 차례나 추천해 준 마리나 사무실의 라이언을 찾아갔다. 라이언 말에 의하면, 이 동네 최고의 정비사는 짐이라는 사람이었지만, 바로 얼마 전 은퇴를 했단다. 이제 다 접고 인생을 즐기러 갔기 때문에 연락이 잘 안 될 거라고 했다. 그 대신 받은 번호로 전화를 해 보니 시간당 요금이 놀라웠다. 엔진을 보기도 전에 첫 통화부터 시급 얘기가 먼저 나오는 게 찜찜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음날, 시크한 검은색 셔츠를 입은 두 사람이 비싸 보이는 공구 트레이를 끌고 도착했다. 선한 인상의 릭과 근육질 대머리 크리스. 우리가 이미 한 테스트와 블리딩 등에 시간을(즉, 돈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일주일간 우리가 엔진에 했던 작업들을 설명하자, 크리스가 나무라듯 말했다.
"이런, 그 스프레이는 디젤 엔진에는 쓰면 안 되는데"
릭과 크리스는 엔진을 이리저리 만져 보며 시동이 안 걸리는 문제를 파악하려 했다. 그러다 오래된 연료 리턴 튜브가 뚝하고 부러졌다. 선주와 눈빛이 마주쳤다.
"역시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오늘 몇 시간이 과금 되려나 연신 시계를 보며 조바심을 내던 우리는 이 순간부터 이들을 신임하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연료 리턴 튜브가 아니고, 고문도 한번 언급한 적이 있는 '부란자'라고 했다. 다만, 엔진이 오래된 영국산이라 부품을 구하는 게 간단치 않고, 온라인으로 주문하면 일주일 정도 걸린다고 했다.
세 시간가량 작업이 끝나고 내역서도 없이 600달러를 결제했지만, 그래도 문제를 찾아냈으니 곧 해결이 될 거라는 기쁨이 더 컸다. 그러나 다음날, 부품 배송에 일주일이 아니라 한 달이 걸린다는 나쁜 소식을 전해왔다. 그래서 고장 난 부란자를 고치는 방향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그럼 일주일이면 해결이 된다고 했다.
라이언은 체크아웃할 때 한 번에 결제해도 된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매일 계류비 결제를 하고 있었다. 선주는 다음 날 출항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인지 매일 지갑을 들고 마리나 사무실에 가서 라이언을 귀찮게 했었다. 이제 포트 앤젤레스 체류가 일주일 더 늘어나게 되었으니, 수리가 완전히 끝나고 출항할 수 있을 때까지 라이언을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기로 했다.
마리나에서 다운타운까지 20분가량 걸어가는 길은 얼마나 많이 다녔는지 이제 우리 동네같이 친숙했다. 같은 마리나에 정박한 어선에서 사카이 연어를 한 마리 사서 요리해 먹기도 하고, 40분이나 버스 타고 큰 슈퍼마켓에 가서 산 고깃덩어리 콕핏에서 구워 먹기도 했다. 옆 배의 선주가 멋지다며 강추한 올림픽 국립공원에 다녀오기도 하고 어느 날은 멋지게 차려입고 동네 핫한 바를 찾기도 하며, 오랜 기다림에 지치지 않기 위해 잘 지내려고 애썼다.
포트앤젤레스 도착 이후, 호라이즌스 호는 매일매일 아름다워졌다. 미끄럼 방지 페인트도 새로 칠했고, 데크는 티크목을 세척하고 건조한 뒤 보호제를 바르니 40년 된 배가 회춘을 한 것 같았다.
선착장에 도착하는 배들을 반겨주고 떠나는 배들에게는 좋은 바람을 기원해 주기도 했다. 우리도 언젠가 출항을 할 수 있기를 꿈꾸면서.
그리고 이제 디데이, 부란자 교체를 하는 날.
크리스와 릭은 엔진의 각종 새는 부분을 다 조였고, 오래된 연료 리턴 튜브를 교체했다. 시동이 안 걸리는 문제가 연료 공급이 안 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했고 그에 따라 부란자를 수리했다. 우리는 이 항해가 계속될 수 있을지 여기서 엔진 문제로 엎어질지 알 수 없어 걱정이 컸지만, 일말의 희망을 안고 데크에 앉아 부르릉! 하는 멋진 엔진 시동 소리를 기다렸다.
케케케케켕....
그러나 부란자를 교체한 뒤에도 귀에 못이 박힌 그 메마르고 날카로운 소리.. 릭이 한번 더 시도해 보았다.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켕.....
부란자만 교체하면 엔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오늘 출동 전에 화려한 견적서를 이메일로 보내왔던 크리스도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그 엔진 스프레이 좀 줘봐요."
기계끼리 딱딱 부딪히는듯한 무서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스프레이를 계속 뿌리며 시동을 걸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은 실패했다. 크리스는 실망이 컸는지 이런 무서운 말도 뱉었다:
"내가 몇 년 전 은퇴하고 이 회사 차리기 전까지 어부여서 잘 아는데, 당신들 이 엔진으로 멕시코까지 절대 못 가요."
릭도 덧붙였다.
"조금 전에야 엔진 시간이 눈에 들어왔는데 30만 시간이 넘던데요. 이제야 봤어요."
깊은 실망으로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엔진을 교체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얘기했으나, 최근의 엔진 공급 부족 때문에 최소 6개월의 대기 시간이 있다고 했다. 게다가 호라이즌스 호는 배꼬리가 뾰족한 선형이라 25마력 정도의 작은 엔진밖에 설치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이렇게 엎어지는 것인가… 이렇게 포트 앤젤레스만 구석구석 탐험하고 집에 돌아가게 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