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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벽나무 Jan 23. 2022

밤바다의 비밀 이야기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진 해변이었다. 가을 초입의 바다는 눈이 시릴 정도로 푸르렀다. 마지막 물놀이를 즐기러 온 가족과 서퍼들이 파도 위를 넘실거리고 있었다. 사람들의 즐거운 비명소리가 파도와 만나 웅웅 울렸다. 해변은 한밤이 되어서야 겨우 고요해졌다. 

 난생처음 한 서핑이었다. 오후 내내 파도와 놀다 나와 샤워를 마치고 나니 온몸에 노곤함이 몰려왔다. 거기다 술까지 한 잔 끼얹었다. 막 썰어낸 회와 매운탕까지 든든히 먹고 해변가를 산책했다. 친구는 앉을자리를 찾아 모래사장을 누볐다. 나는 혼자 슬그머니 파도가 뭍을 치고 돌아가는 경계에 가 섰다. 

 어렸을 적부터 왠지 모르게 밤바다에 끌렸다. 일출보다 일몰을 더 좋아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까? 한낮의 쨍한 파랑으로 빛나는 바다와 구름이 몽실 떠 있는 하늘도 황홀했으나, 밤의 바다에는 낮의 바다와 다른 정적인 아름다움이 있었다. 파도는 해가 떨어지는 순간부터 빠른 속도로 두려움을 뭍으로 밀고 왔다. 밤바다는 그 두려움마저 잠식했다. 

 끝도 없이 펼쳐지는 어둠이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수평선을 가늠해 방향을 짚어봐도 모든 것이 모호했다. 발끝에 닿을락 말락 하는 파도의 포말만 회색빛으로 일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서울에서는 흐리기만 한 별들이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대로 가만 보고 있으면 숨어있던 별들도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별들은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빛의 레버를 조금씩 조정했다. 살아 움직이는 모습이었다. 물론 머나먼 과거에 포착된 찰나일 뿐이지만. 

 귓가엔 거친 물결 소리만 쉼 없이 울렸다. 파도는 일정한 간격으로 그러나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내게 왔다가 갔다. 모래사장과 그 바깥에 늘어선 건물들, 인조적인 빛과 소음, 아등바등 붙어살아야 하는 땅을 등지고 서서 밤바다와 마주했다. 현실이 점차 흐려지고 나와 존재의 경계까지 허물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가만 서서 온몸으로 어둠을 받아들였다. 


 명상을 할 때면 환상처럼 여겨지던 ‘나를 비우는’ 일이 실제로 가능함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었다. 빛처럼 스쳐가는 순간이었고 희귀하게 체험하는 감각이었지만 가장 강렬한 통찰이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고 동시에 전부였다.

 처음엔 다짜고짜 눈물이 나왔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체험이었다. 처음 친구들에게 이야기했을 땐 그 상냥하던 사람들이 나를 의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나는 신천지 아니야, 하고 덧붙인 뒤 웃었다. 스스로 조금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굳이 설명할 필요 없는데 말이야.  

 작년 픽사의 영화 <소울>을 보다가 깜짝 놀란 장면이 있었다. 영화 초반 주인공이 죽고 영혼이 되어 은하수에 놓인 계단을 흘러가던 장면이었다. 계단이 도달하는 곳엔 새하얗고 커다란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주인공 옆에 있던 할머니 영혼이 말했다. “오랫동안 기다린 곳”이라고. 나는 그곳이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눈을 감고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있는 동안 다녀와 본 그곳이었다.  

 양양의 밤바다 앞에서도 나는 다름 아닌 그곳에 있었다. 커다랗고 텅 빈, 우주처럼 무한한 그곳에. 무수한 별이 빛나고 있는 그곳에.

 눈을 뜨고도 명상을 할 수 있구나. 그런 깨달음이었다. 순간 파도 소리에 섞여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나긋하게 이야기하는 다정한 목소리. 나는 모래사장에 떨어뜨린 열쇠를 찾듯 신중하게 그러나 빠르게 소리를 파헤쳤다. 고개는 여전히 하늘 끝을 향해 있었다. 선명한 별들 사이로 희미하게 깜박이는 빛이 보였다. 소멸을 앞두고 있는 별이었다. 꺼져가는 전구처럼 빛이 불규칙적으로 끊기듯 이어졌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저 별의 것임을 알 수 있었다. 별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간절하고 절박하게. 깨달음과 동시에 어둠 속엔 나와 별만 남고 모두 흐려졌다. 그제야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모래사장에서 찾은 것은 열쇠가 아니라 반듯하게 접힌 쪽지였다. 고작 몇 줄 담겨 있는 작은 쪽지. 동시에 가장 중요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쪽지. 

 쪽지를 펼친 나는 손 안에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그 말을 마음에 담으며 어김없이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미소 짓고 있었으니 꽤 그로테스크한 모습이기도 했다. 밤바다에 아슬아슬 서서 울고 웃는 기괴한 사람의 모습. 어둠은 그 꼴사나운 모습도 감쪽같이 감춰주었다. 나는 파도로 눈물을 닦은 뒤 내 안 가득 흘려 담았다. 어느 때보다 맑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몸을 돌려 친구에게 돌아갔다. 젖지 않은 플라스틱 의자를 겨우 구해 앉아있던 친구가 터벅터벅 걸어오는 나를 보며 물었다. 

 “뭘 그렇게 오래 봤어?” 

 나는 대답했다. “아무것도 없지 뭐.” 

 그 무엇도 없고 동시에 전부가 있었어.


 이 이상한 이야기를 읽고 나면 상냥하던 사람들도 의심쩍은 눈을 할 것이다. 그럼 나는 다시 한번 신천지가 아닙니다, 하고 웃을 뿐. 

 조금 바보 같죠. 그냥 한 번 얘기해봤어요,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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