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 제조업지구 역사 살펴보기
2부: 27층 주상복합아파트보다 가치 있는 것에서 이어집니다.
청계천 일대의 상업지구, 자주 '세운상가 일대'라고 불리는 그 상권에 관해 살피는 일이 시작이었다. 여러 목소리가 교차하는 현장이었다. 목소리를 '정리'하는 일이 다음 단계였다.
오래 정리하다보니 흐름을 거꾸로 훑고 있었다. 아래는 그 결과물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몇 가지를 먼저 밝힌다.
1950년부터 1999년까지 대체로 10년 단위로 분기했고, 2000년~2019년까지는 한 데 묶었다. 중제마다 당시 당국이 붙인 구역의 이름과 주민에 있어서 장소의 쓰임을 함께 표기했다. 일대가 당대 어떤 공간이었는지를 두 이름이 드러낸다고 파악한 까닭이다.
세운상가는 현재 서울시 종로구 종로 1~4 가동, 서울시 중구 을지로동, 서울시 중구 광희동을 횡으로 길게 지른다. 셋 모두 행정동으로 본문에는 세 지역에 포함되는 다른 지명-장사동, 필동 등의 법정동-이 등장한다.
건물이 세 개 행정동을 가로지르고 건물 일대 역시 유기적으로 상가와 연계하며, 중간에 청계천이 흐르는 데 따라, 을지로 전자상가, 청계 전자상가, 세운상가 일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제목에서는 이전의 매거진이 ‘을지로’를 주제 삼은 점, 해당 상공업지구의 특장점으로 ‘제조업’이 언급되는 점에 주목해 해당 구역을 ‘을지로 제조업지구’로 명명했다. 다만, 본문에서는 당대의 명칭을 따랐다.
이 글보다 상세하고 잘 정리된 글이 많다. 다만, 제가끔 분산된 정보를 한 데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또한, 당대의 ‘제도’와 ‘사람들’을 함께 정리해 보는 일이 유의미할 것이라는 판단 역시 있었다.
“서울정책아카이브>세운상가 조성계획: 세운상가 건립과 재생”과 “도심 속 상공인 마을 2권”을 정리의 기반 삼되, 근거가 더 필요하다고 판단될 경우 다른 자료 역시 참고했다. '도심 속 상공인 마을 2권'은 필요 시 쪽수를 출처와 함께 미주에 표기했고, 참고한 이외의 자료도 미주에 출처표기했다.
일제 강점기부터 1960년대까지, 종묘 앞(종로구 훈정동~중구 필동)에는 대규모의 공터가 있었다. 전시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마을로 불이 옮겨 붙는 것을 막기 위해 비워둔 것인데, 한국전쟁 이후까지 그대로 방치된 까닭이었다.
당시 서울로 내려오거나 올라온 실향민(피난민, 월남민, 도시로 올라온 농민)이 이곳을 거처 삼는다. 1950년대 중반, 민간의 요구로 개인에게 매각된 50%의 땅-골목 안쪽-에는 주택가가 생겼고, 이외의 땅-청계천 뚝방길-에는 무허가 판자촌이 형성됐다. 그야말로 방치된 땅이었기 때문에 ‘종삼’ 혹은 ‘서종삼’으로 불리던 대규모 집창촌이 이곳에 자리잡기도 했다.
같은 위치에 ‘상가’ 역시 들어섰다. ‘상가’라고 이름 했지만 노점상과 고물상이 대부분으로, 근처(이태원, 동두천)에 미군부대가 있어 노점상과 고물상의 취급 품목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전쟁 물자를 포함했다. 군복이나 담요를 팔 때는 걸리지 않게 염색해 팔았다.1)
주거는 골목 안쪽 주택가에서 하고 장사는 뚝방길로 나와서 하는 이도 있었고, 뚝방길 판잣집에서 거주와 생계를 모두 수행하는 이들도 있었다. 노점상과 고물상에 일종의 ‘생태계’가 형성되어서, 노점에는 암묵적인 ‘제 자리’가 있었고2), 미군물자를 유통하는 ‘경로’가 암암리에 형성되고 공유되었다.3)
당국에서 손을 놓고 있던 구역이었기 때문에 일대는 상하수도나 도로 등의 제반 시설이 부재했다. 사람들은 오수와 하수를 그대로 청계천에 흘려보냈고, 보행과 교통은 쉽게 엉겼다. 이에 1958년 청계천 복개사업을 시발점 삼은 무허가 건물 철거 작업이 종로구 및 중구에서 시행된다. '불량주택 개량사업'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다.4)
이 곳을 주거 삼았던 많은 판자촌 주민들이 이에 반발하나, 당국은 강경하게 사업을 밀어붙인다. 이 과정에서 일종의 일종의 '조건부 입주권'이 제시된다. 철거 예정 지구의 주민들에게는 스스로 자리를 옮기면 이후 이곳에 세워질 건물의 입주권을 주고 거부하면 강제 철거한다는 방침을 공표한 것이다.
일대의 불량주택 개량사업은 1961년까지 진행된다. 청계천 복개 및 판자촌 철거 사업으로 확보한 ‘부지’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와 관련한 논의가 이와 함께 전개됐는데, 1966년 건축가 김수근에게 설계를 의뢰하기 전까지 부지의 구체적인 구성 요소에 관한 것은 결정되지 않으나 논의마다 상하수도 및 도로를 포함한 제반시설과 함께 ‘건물’을 건설한다는 골자는 비슷했다.
무허가 판잣집에 거주하던 주민들은 이때 다수가 성남시 등의 타지로 옮겨갔고5), 노점상과 고물상은 그간 번 돈을 기반으로 ‘골목 안쪽 민간 소유의 주택가’에 세를 들어 업을 이었다.
공구상과 소규모 공장이 일대에 모여든 것은 이때다. 과정은 다음과 같았다. 청계천 뚝방길에서 공구를 팔고 부품을 만드는 일로 생계를 잇던 이들 역시 다른 노점상과 고물상처럼 이때 골목 안쪽으로 업장을 옮긴다. 이들의 일은 쇠를 깎고 망치질을 하는 것으로, 매우 큰 소리를 동반하는 것이었다.
근처에서 '살던' 이들에게 이같은 소음과 공존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골목 안쪽 주택가에 살던 이들은 집을 세 놓은 다음, 타지로 주거를 옮긴다. 공구상과 소규모 공장이 모여있다는 소문에 또다른 공구상과 소규모 공장주들은 집주인이 세 놓은 자리에 가게를 차린다.6)
주택가에서 공구상가 및 공장가로 탈바꿈하게 된 이 공간이 종로구 장사동(종로 1, 2, 3, 4 가동 아래의 법정동)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는 공구상 및 공장뿐 아니라 ‘전자전기’ 관련 상가도 이곳에 모이기 시작한다. 라디오가 국내에 유통되기 시작하면서 이를 유통하고 관리하는 ‘유통상’과 ‘기술자’가 부품과 공장이 밀집한 장사동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때 모인 인력과 물자와 노하우는 이후 세운상가 및 주변 골목 상가가 “한 바퀴 돌면 미사일도 만든다”는 공업, 전자상가를 이루는 기반이 된다.
불량주택 개량 사업 아래의 대규모 철거를 통해 확보된 부지에는 1968년 '세운 상가아파트'가 설립된다.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 세운 상가아파트는 최초 설계에 따르면 모든 건물군을 '보행데크'로 이어 보행자는 건물에서 건물로, 차는 땅에서 땅으로 이동토록 해 "보차가 분리된" 건축물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보차는 분리되지 않았고, 사람들은 땅에서 차들과 엉겨 통행했다. 각 부지마다 시공사가 달라 저마다 설계를 변경한 탓이었다. 이는 이후 세운상가의 재개발 계획이 고개 들 때마다 근거가 된다.
세운 상가아파트에 대한 민간의 인기는 그러나 이와 무관하게 높았다. 실내 골프장, 사우나, 교회 등이 입점한 ‘고급 아파트’가 당시 희소했기 때문이었다. 입주민은 빠르게 채워졌고, 상권 또한 따라서 빠르게 형성됐다.
주상복합아파트였기 때문에 생필품 상가가 들어서는 가운데, 세운 상가아파트 인근, 골목 안쪽에 여전히 공구상가 및 소규모 공장, 전자전기 상가가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맥락이 닿아있는 가전제품 상가나 전자부품 판매점 등도 다수 입점한다. 이전 장사동 일대에 형성된 '망(Network)'이 세운상가가 들어서며 확장된 셈이다.
이 시기 세운 상가아파트와 근처 골목 상가의 인기는 대단했다. 선풍기를 사기 위해 긴 대기줄이 만들어질 정도였다. 전자제품을 유통하는 곳이 희소했거니와 수리할 수 있는 곳은 세운 상가아파트와 근처 골목 상가가 거의 유일했던 까닭이었다.7)
누군가에게는 '거주하는 곳', 다른 누군가에게는 '팔거나 사러 오는 곳'이었던 이 곳에 그러나 1970년대 중후반부터는 조금씩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한다.
인기는 길지 않았다. 1970년대 중후반부터 ‘백화점’이 인기를 끌면서 중구의 중심 상권이 인접한 명동으로 옮겨갔고(신세계 백화점 본점, 롯데백화점 본점은 모두 명동에 있다), 서울 곳곳의 슬럼을 타파할 새로운 시가지의 필요를 이유로 국가 수준에서 ‘강남 개발’을 실시하며 고급아파트의 중심지 역시 이동한 때문이었다. 상권이 가라앉고 주거기능이 축소됐다.
인기가 떨어지자 세운 상가아파트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가 하나씩 수면 위로 올랐다. 보차분리에 실패해 일대 교통의 혼잡을 야기했다는 비판이 하나, 녹지축을 단절했다는 평이 다른 하나, 세운 상가아파트가 남북 방향으로 건설된 것은 적절하지 않은데, 동서 방향으로 발달한 서울의 도시 흐름을 끊고 이웃블록의 활성화를 저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 또 하나였다.
1977년 ‘수도권 인구 재배치 계획’과 함께 발표된 ‘도심 부적격 기능점포’ 또한 세운 상가아파트 및 주변 점포에 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배가한다. 당시 부적격 판정을 받은 시설은 서울 전역 9개 업종 7천 여 가게로, 청계천·을지로 공구상, 을지로 건재상, 을지로 화공약품상 등의 시설이 여기 포함됐다.9)
'도심에 부적격한 점포'로 공표된 해당 가게들은 이후 천천히 여러 상권으로 이전하게 되는데, 이는 이후에 다루도록 한다.
거주 및 상권의 쇠락과 잇따른 당국의 부정적인 평가로 세운상가와 관련된 재개발 계획은 2000년 이전 이미 몇 차례 수립된다. 다만, 해당 계획은 모두 실행되지 않는데, 부지가 워낙 여러 조각으로 각기 다른 토지주에게 쪼개져 있어 보상금이 막대하게 필요했던 탓이었다.
당국이 재개발 계획을 세웠다가 파기하기를 반복하던 이때 세운상가 일대, 그중에서도 특히 ‘전자상가’는 다시한번 전성기를 맞는다. 노래방 기계와 게임기를 통해서다.
노래방 문화는 일본의 ‘가라오케’에서 건너온 것이었지만, 국내 노래방 산업화에 기여한 것은 국내에서 제작한 노래방 기계였다.
1990년대 초 영남에서 시작된 노래방 문화가 서울로 확산되자, 세운상가 일대에 “노래방이 뜬다”는 소문이 퍼진다. 유통'선'과 기술력을 가진 상인 및 기술자들은 업종변경 등으로 노래방 기계 업계에 뛰어들고, 가지고 있던 유통선과 기술력을 노래방 기계에 쏟아부어, 다양한 노래방 기계와 노래방 프로그램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양한 개발이 가능했던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제조문화가 그것이다. 한 번에 대량을 찍어낼 필요가 없으니 적은 개발비로도 다양한 실험을 해볼 수 있었던 것이다.11)
세운상가와 인근에 모여든 인력과 기술력은 비슷한 시기(80년대 말~90년대 초) 국내 유통되기 시작하던 ‘게임기’ 업계로도 향했다. 이들은 일본에서 넘어온 게임과 게임기를 변형하고 복제해서 유통하는 방식으로 업계를 키웠다.
다만, 어디까지나 ‘불법 복제’, ‘불법 유통’이라는 맹점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게임기 관련 상가는 1987년 저작권법이 도입되고 전자오락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면서 서서히 수가 줄게 된다. 그럼에도 2000년대 초반까지 세운상가의 인상이 '게임 및 게임기 파는 곳'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그 명맥은 이후로도 오래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11)
한편, 인현동을 포함한 을지로동 인근의 세운상가 일대에는 전통적으로 인테리어 및 건자재(목재) 상점이 밀집해 있었는데, 이 상권 역시 전자상가와 비슷한 시기 호황을 맞는다. 강남개발로 시작된 인테리어 붐이 1988년 노태우 정부의 ‘200만 호 건설’ 주택공급 계획 발표를 전후해 폭발한 까닭이었다.12)
1990년대 후반, 1987년 시 당국의 주도로 조성된 ‘용산전자상가’를 시작으로, ‘강변 테크노마트(1998년)’, ‘국제전자센터(1997년)’ 등의 ‘전자상가’가 서울 곳곳에 형성된다. 이에 따라 기존 세운상가의 상인들이 다른 상권으로 흩어지면서 기존의 '망'이 성글어진다. 일반 손님에게 세운상가는 이제 '유일한 가전제품 상가'나 '중심상권'이 아니라 "서울 북쪽 전자상가"다.14)
1997년 외환위기 역시 세운상가의 쇠락에 영향을 미친다. 적지 않은 영세 상점이 외환위기를 전후해 문을 닫은 것으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2000년 초반부터 활발해진 인터넷 거래 역시 세운상가 일대의 부진에 영향을 미친 요소다. 현장에서는 실물과 작동만 확인하고 구매는 인터넷에서 최저가를 검색해 진행하는 소비 양식이 대중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설상가상 실물을 확인하는 ‘현장’의 지위마저도 ‘하이마트’, ‘홈플러스’ 등 가전제품을 취급하는 대형 쇼핑몰에 가격과 거리 면에서 뒤쳐져 빼앗기면서 세운상가의 경기는 크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다만, 노래방 및 오락실 게임기 등 당시 주력 종목이 대부분 '소매'보다는 '도매'에 중심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세운상가는 이때 역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상권이었다. 또한, 일반 손님이 줄었다고는 하나, 그제껏 자리 지키고 있는 가게를 복덕방처럼 찾는 '마니아' 손님의 방문은 이어졌다.
세운상가 일대의 경기가 가라앉자, 다시금 해당 구역 대상의 재개발 계획이 고개를 든다. 시발점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청계천 복원 사업’이었다. "청계천을 복원하고 주변 상권을 활성화하자. 이를 위해 인근 지역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 골자였다.
기존 상인들의 이주지로 시 당국은 송파구 문정동의 ‘가든파이브’를 가리켰다. 상가는 입주가 시작되고 한참 후까지 채워지지 않았다. 복합쇼핑몰 형태로 조성된 가든파이브는 공구상 및 소규모 공장에 적합하지 않았다. 부품을 조달하는 데 한나절이 걸렸다. 높은 분양가도 문제였다.15)
적지 않은 상인들이 가든파이브로의 이주를 거부했다. 가든파이브에 입주했던 상인 일부는 자리잡지 못하고 세운상가 일대로 돌아왔다. 다른 상가로 재이주하는 상인도 있었다.16)
오세훈 전 시장 역시 취임 후 세운상가 일대의 재개발을 공표한다. 세운상가를 전면 철거하고 남산과 종묘를 잇는 1km의 녹지축을 복원하겠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계획에 따라 현 세운상가 가동 위로 뻗어있던 ‘현대상가’는 철거됐고, 이어 공원을 조성하는 데까지는 현실화되었으나,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로 자금을 조달하기 어려워지면서 계획은 다시 연기된다.
현재 세운상가 일대 재개발 계획은 박원순 현 서울시장의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되고 있다. ‘보존형 개발’이라는 이름이다. 보존형 개발이라는 이름이지만 여전히 철거를 포함한 개발이라는 점에서 반발은 크다. 올해 초 "전면 재검토" 발표 이후, 일대의 혼란은 더욱 가중되는 모양새다.
공청회 등의 통로로 논의를 지속하고 지나치게 높은 분양가를 지양하기 위해 뉴딜 사업과 연계를 꾀하는 등 활로를 찾고 있지만, 이전의 여러 재개발 논의에서와 같이 당국이 제시하는 건물의 성격이 세운상가 일대의 망을 지속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점이 가장 격전지라 여전히 접점 찾기는 묘연한 상황이다.
세운상가 일대의 상인들은 길게는 몇 십 년 한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다. 일에 들인 품과 오래 이웃한 동료로 하여금 그들에게 세운상가는 이미 오래 전부터 그들이 본디 있던 자리, 제자리다. 건물이 무너질 때 그곳에 있던 어떤 자리가 함께 무너지는 것인지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1) 도심속상공인마을 2권 17쪽
2) 같은 책 16쪽
3) 같은 책 21-22쪽, 25-26쪽
4) 서울역사박물관>학술·자료>서울역사 아카이브>인현동의 판자집 철거(1966)
5) 도심속상공인마을 2권 19쪽
6) 같은 책 19쪽
7) 같은 책 29-31쪽
8) 중앙일보 1979년 기사 “서울도심 3천7백개 점포 이전”
https://news.joins.com/article/1504126
9) 중앙일보 1980년 기사 “철제·공구·건재상등 9개업종ㅣ7천개소 변두리로 이전”
https://news.joins.com/article/1529522
10) 서울역사아카이브>서울생활문화자료조사>조사지역별>종로구>세운상가>65019번 아카이브
11) 중앙일보 1987년 기사 “파로에 선 청계천 전자시장”
https://news.joins.com/article/2085129
12) 도심속상공인마을 2권 38-41쪽
13) 서울 도시재생 포털>세운상가일대 도시재생 활성화계획 보고서.pdf
14) 도심속상공인마을 2권 37-38쪽
중앙일보 1999년 기사 “[서울 동서남북 전자상가 4곳 비교]”
https://news.joins.com/article/3854555
15) 도심속상공인마을 2권 41-43쪽
머니투데이 2019년 기사 “"혈세 1.3조 썼는데"...청계천 상인들 외면한 가든파이브”
16) 연합뉴스 2017년 기사 “정치권에 휘둘리며 침체한 세운상가...우리 아직 살아있습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70924053300004
*참고자료
경향신문 2019년 5월 기사 “‘세운상가 5구역’에 공공 상가·공장 짓기로”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905302057005
집필. 현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