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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Aug 15. 2020

4. 집고치기의 낭만과 비교우위




  내 손으로 우리가 살 집을 고친다는 생각에 방방 뜨는 기분을 겨우 누르며 철물점에 들러 대형 물뿌리개와 벽지 제거용 헤라를 샀다. 페인트칠을 하려면 먼저 벽에 발라져 있는 벽지를 모두 뜯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일을 하다가 목을 축일 시원한 음료까지 테이크아웃 했겠다 우리 둘은 한껏 들뜬 기분으로 벽과 마주 보고 섰다. 좋아하는 작업용 멜빵바지까지 갖춰 입어서 그런지 의욕이 샘솟는 것 같았다.


  우리 멋진 페인트 벽을 만들어 보자!


   호기롭게 커터칼로 오돌토돌한 벽지에 망설임 없이 흠집을 낸 후 엄지와 검지의 손끝으로 약간 벗겨진 벽지를 놓치지 않도록 힘을 주어 잡고 쫘악 뜯었다. 오 마이 갓. 그 뒤엔 당황스럽게도 또 다른 벽지가 있었다. 그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누렇게 색이 바래 있었던 벽지. 거기에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촌스런 문양까지. ‘아, 우리 31년 된 집을 샀지.’ 그제야 제대로 실감이 났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정한 간격으로 그려진 벽지의 문양들이 벽 앞에서 멍 때리고 있는 나를 킥킥 비웃었다.



 보통 도배를 새로 한다고 하면 기존의 벽지는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새로운 벽지를 바르는 식이다. 그러니 30년 간 주인이 수도 없이 바뀌면서 그 횟수만큼 우리집의 벽지도 한 겹 한 겹 퇴적되어 왔을 것이었다. 순진하게도 벽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30여 년의 세월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가 벽지 밑 벽지의 존재를 알게 된 순간 우리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벗겨도 벗겨도 나오는 벽지가 적어도 대여섯 겹은 되는 것 같았다. 당연히 걔네는 한 번에 시원하게 벗겨질 리가 없었고 그래서 우리는 여러 번 절망했다.




마치 나를 비웃는 것 같았던 누런 벽지와 아무리 뜯어도 계속 나오던 벽지들




| 벽지 뜯는 순서 |

 1. 커터칼로 흠을 내어 손으로 뜯을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많이 뜯어낸다.
 2. 손으로 못 뜯는 부분은 대형 물뿌리개로 충분히 적신 후 날카로운 헤라의 끝으로 힘을 주어 긁어낸다.
 3. 그래도 안 되면 스팀다리미로 열과 습기를 가한 후 헤라나 커터칼로 긁어낸다.


tip. 몇 겹의 벽지 뒤에 꽁꽁 숨겨져 있던 진회색의 콘크리트가 마침내(!) 드러날 때 즈음에는 벽지를 붙이는 접착제가 들러붙어 잘 제거되지 않아 사용하던 스팀다리미의 도움을 받았다. 작업하기 훨씬 수월해졌지만 그 대신 나는 스팀다리미 하나를 잃었다.




  역시나 글로 쓰면 이토록 간단한 일이 되어 버리지만 실제로는 나와 연이 둘이서 벽지를 깨끗이 뜯어내는 데만 2주가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웃긴 건 집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 부엌 공간과 그 주변만 작업하는 데에도 그 정도의 시간이 걸렸다는 점이다(생전 처음 시도해 보는 일이라 요령이란 게 없었고, 퇴근 후 시간과 휴일밖에 투자할 수 없었으니 더 오래 걸렸을 수는 있다).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리는 건 둘째 치고 몇 시간 동안 벽지만 좌악좌악 뜯어내고 있자니 ‘내가 이거 하려고 이 집을 샀나?’ 하는 생각이 들며 후회의 감정이 물 밀 듯 쏟아져 들어왔다. 끝이 보이지 않는 노동에 몸도 피로했지만 나쁜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느라 감정적으로도 꽤나 고단했다.





한동안은 벽지를 뜯다가 바닥에 주저앉아 간단히 끼니를 때우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우리는 둘 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었으니까 휴일 아니면 퇴근 후 밤에 벽지를 뜯었다. 작업용 조명 한 두 개는 그래도 남겨 두었어야 했는데 생각 없이 전부 철거해버리는 바람에 우리는 어둠 속에서 벽지를 뜯곤 했다. 그나마 남겨둔 희미한 베란다 조명 불빛에 의존해서. 어떤 날은 퇴근 후 장장 다섯 시간 동안 둘이서 말도 안 하고 벽지만 뜯었다. 캘리포니아 해변가를 드라이브할 때나 어울릴 법한 LANY의 노래를 노동요로 틀어두고도 우리는 흥얼거리지도 않았다. 나는 집중하느라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성격의 사람이지만 연이는 원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온갖 기교를 다 섞어 무슨 노래든 따라 부를 아인데. 그런 애가 일을 하느라 콧노래조차 부르지 않다니. 그를 7년 넘게 보아오며 처음 겪는 신기한 일이었다.


  연아, 왜 노래 안 따라 불러?
  응?
  무슨 기분 나쁜 일 있어? 조용하니까 이상하네.
  아니. 녕이 고생하는 거 짧게 해 주고 싶어서 집중하느라.




  혼인신고 후 첫 두 세 달은 통째로 집을 고치는 데 시간을 빼앗겼지만 온통 나쁘지만은 않았다. 연이는 아무렇지도 않게 진심을 담아 저런 힘이 나는 말을 한 번씩 던져주는 사람이었으니까.



다섯 시간 동안 벽지만 뜯었던 어떤 밤





  집고치는 과정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과정을 하나만 꼽으라면 일 초도 고민하지 않고 벽지 뜯기라고 말할 거다. 제일 힘들었던 기억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사실 제일 힘들지는 않았는데 집을 고치자 결심하고 가장 먼저 착수한 작업이 벽지 뜯기라서 그럴 수도 있다. 모든 것이 새로웠던 때에 시작한 일이니까. ‘나는 도대체 왜 집을 고치자고 해서는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유일하게 과거의 내가 미워졌던 순간도 벽지를 뜯는 와중이었다. 페인트로 칠해진 벽을 가지겠다는 발칙하고 건방진 생각만 하지 않았어도 벽지를 뜯을 일은 없었을 테고 생고생하는 시간이 훨씬 줄었을 텐데. 뭘 모르는 사람이 더 용감하다고 하더니 딱 이럴 때 하는 말이구나.


  내가 지금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우리집 식탁에서는 조명 빛을 받아 살짝 반짝거리는 펄 벽지도 보이고 말간 페인트 벽도 보인다. 벽지 뜯기가 상상 외로 고된 노동임을 깨닫고 중간에 포기하는 바람에 우리집은 페인트 벽과 벽지가 발라진 벽이 공존하는 집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찌 보면 뭐 하나 완벽하게 마무리된 곳이 없는 미완성의 집. 하지만 그래서 우리에겐 더 애틋하고 낭만적인 집. 집의 일부라도 페인트칠을 해 보지 않았다면, 힘들게 벽지를 뜯어보지 않았다면, 말갛고 매끈한 페인트 벽을 가지는 기쁨이 어떤 것인지 나는 알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오돌토돌한 엠보싱도, 은은하게 반짝거리는 펄도 없는 그저 우윳빛의 말간 벽. 1년이 지난 지금도 그 벽을 손으로 스윽 쓸어내리면 왜인지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낭만에 죽고 못 사는 나에게도 낭만이 전부는 아니었나 보다. 대학교 1학년 때 경제학원론 수업에서 겉핥기식으로 배운 비교우위 이론을 벽지를 뜯다가 뼈저리게 체감한 것이다. 사람들이 생선을 직접 잡지 않고 생선 가게에서 사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고, 과일나무를 직접 키우지 않고 과일 가게에서 사는 데에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러니 내게 또다시 인테리어를 하게 될 기회가 찾아온다면(좋아하는 것이니 당연히 또 하게 되겠지만) 그때는 전부 다 전문가에게 맡길 수 있을 만큼 돈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고 싶다. 그때는 낭만보다 비교우위를 더 생각할 거다. 벽지 뜯기는 벽지 뜯는 사람에게!







인스타그램 @dexy.koh

페인트 바른 말간 벽이 완성되어 가던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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