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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덱시 Sep 18. 2020

5. 나의 오랜 로망, 셀프 페인팅




  벽지를 불리려고 물을 하도 뿌려서 축축해진 콘크리트 벽이 우리 눈 앞에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벽은 물을 한껏 머금어서 원래 컬러보다 몇 톤쯤 낮은 진회색이 되어있었다. 벽지 떼기 작업을 겨우 마무리한 후 나는, 어떤 일은 그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그 사람에게도, 나에게도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아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시작할 무렵에도 어렴풋이 알고 있긴 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사서 고생하기로 한 이유는 1) 돈을 아끼고 싶어서 2) 우리가 살 집은 우리가 고치면 좋을 것 같아서였다. 생각보다 훨씬 험난한 과정이었지만 말이다.


  벽지를 모두 떼어내면 핸디코트 작업-사포질-페인트칠로 이어지는 대서사가 기다리고 있다. 스팀다리미까지 동원해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쌓여있는 벽지를 박박 긁어내는 것만으로도 너무 지쳤는데 그보다 더한 작업들이 줄줄이 이어지다니. 그냥 사람을 불러 버릴까 살짝, 아주 살짝 망설였지만 이제 와서 사람을 부르자니 왠지 좀 자존심이 상했다. 시작한 일은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골치 아픈 성격의 소유자인 나는 결국 그 일련의 과정을 연이와 함께 전부 책임지기로 했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종종 여행을 다닐 때에는 에어비앤비를 샅샅이 뒤져 마음에 쏙 드는 집을 여행지 숙소로 정하곤 했다. 나의 취향은 너무나 확고해서 런던, 뉴욕, 파리에서 묵었던 숙소들을 쭈욱 나열해 두고 살펴보면 같은 집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 일관적이었다. 걸을 때마다 삐걱거려서 고양이처럼 사뿐히 걸어야 하는 원목 마룻바닥, 그 위를 덮고 있는 빈티지한 패턴의 카펫.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얀색 벽. 페인트로 마감되어서 뽀얗고 매끄럽고 요철이 없는 그 벽들에 나는 항상 매료되곤 했다. 여행이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아름다워 보이게 만드는 속성이 있어서, 페인트 벽이 아니라도 뭐가 되었든 반해버렸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생경한 도시 속 새하얀 페인트 벽과 거기서 느껴지는 살짝 서늘한 감촉은 내 시각과 촉각을 유달리 황홀하게 했다. 그런 기억들이 모여 결국 나를 셀프 페인팅의 세계로 이끈 것이었다. 우리집 벽에 페인트가 칠해져 있다면 매일이 여행 온 기분일 것 같았다.





뉴욕 여행 중 머무른 숙소(사랑해마지 않는 페인트 벽의 느낌)





벽지
+ 시공이 쉽고 빨리 끝난다.
- 떼가 타거나 손상이 가면 그 부분만 보수가 불가능하며 전체를 도배해야 한다.

페인트
+ 누군가 벽에 그림을 그렸다 한들 그 부분만 다시 쓱 칠하면 된다.
+ 못을 박았던 부분은 퍼티로 채워주면 벽지보다 감쪽같다.
- 단계가 많고 건조가 필요해 시간이 오래 걸린다.




  미적인 면을 차치하고서 기능적인 면만 보더라도 페인트는 벽지에 밀릴 이유가 없었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페인트의 단점은 단 한 가지. 완성시키는 과정이 욕 나올 정도로 길고 지난하다는 것이었다.


#1. 핸디코트 작업


  벽지를 깨끗이 떼어낸 후 납작한 헤라를 이용해 울퉁불퉁한 콘크리트 벽 위에 핸디코트를 얇게 펴 바른다. 최대한 평평하고 매끈하게. 페인트가 잘 먹을 수 있도록. 이걸 퍼티 혹은 핸디코트 작업이라고 한다. 뻑뻑한 핸디코트를 헤라에 얹어 치덕치덕 펴 바르다 보면 손목이 너덜거리기 시작하지만 이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면 벽이 한결 매끄러워지기 때문에 건너뛸 수는 없다.



콘크리트 벽 위에 핸디코트를 치덕치덕 발라 평평하게 해주는 작업



#2. 사포질


  핸디코트 작업을 아무리 잘했다고 해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미세한 요철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사포질을 한 번 해주어야 한다. 그라인더를 사용하면 작업이 한결 편해졌겠지만 우리에게 그라인더가 있을 리 없다. 이번 한 번을 위해 그라인더를 구매하기에는 돈이 아깝고, 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러면 방법은 하나뿐. 다들 아는 그 사포를 뭉터기로 사서 벽을 무지막지하게 문질렀다. 몸에 뚫려 있는 구멍이란 구멍에 석고 가루가 쌓이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허연 가루를 뒤집어써서 눈사람처럼 웃긴 몰골이 된다. 서로를 가리키며 정신 나간 사람들처럼 킥킥거린다.



#3. ‘드디어’ 페인트칠


  사포질 후에는 보통 페인트의 접착력을 높이고 색이 더 잘 나도록 프라이머라는 것을 칠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페인트를 칠했다. 페인트는 색이 잘 날 때까지 두세 번 덧칠해 준다. 한 겹씩 얹을 때마다 시간을 들여 완전히 건조해 주어야 하며 매번 사포질에도 공을 들여야 한다. 팔과 손목이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세 개의 문과 문틀, 베란다와 욕실 천장 페인트칠도 함께 진행했다.




  오랜 노동 끝에 페인트 벽 완성이 점쳐지던 날에는 회사에 있으면서도 정말이지 벽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빨리 퇴근하고 현장으로 달려가 페인트칠을 마무리하고 싶은 생각뿐. 마침내 그 벽 앞에 섰을 땐 이걸 진짜 우리가 한 게 맞나 싶을 정도로 꿈같았다(비록 집 전체도 아니고 일부이긴 했지만). 부엌은 이제 겨우 도면 그리기를 끝냈고, 싱크대 원목 상판을 제작해 줄 업체를 수소문해야 하고, 부엌에 들어갈 것들(싱크대, 수도꼭지, 인덕션, 후드)을 하나씩 전부 골라야 하는 등 아직 할 일이 쌓여있었지만 그래도 우리는 훌륭하게 한 고비를 넘긴 셈이었다.


  

  보고 싶은 풍경과 만지고 싶은 물건으로 가득 찬 집에서 사는 일은 일상을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고 풍요롭게 바꾸어 준다. 그리고 나에게 있어 페인트 벽은 그런 존재 중 하나였다.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집이 가장 좋아하는 곳이 되면 그저 그런 일상도 조금은 특별해지니까. 내가 약간의 귀찮음과 엄청난 고생스러움을 감수하면서까지 끊임없이 집에 애정을 쏟는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테다.



  한동안 넋을 놓고 텅 빈 벽만 바라봤던 저녁이었다.






인스타그램 @dexy.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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