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꺼운타인 Sep 26. 2022

꽂히는 말

먹는 것에 꿀리면 인생 전체가 꿀린딘

요즘 꽂힌 말이 있다. 영혼을 사로잡는 시인의 말도 아니고, 생의 무게를 덜어주는 사색 섞인 말도 아니다. 대단한 말은 아니지만 먹는 것에 진심인 사람들에게는, 그 진심을 더욱더 공고히 하는 말이라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주제넘게 먹어온 입이 부끄럽지 않도록, 다시 한번 맛있는 인생을 꿈꾸게 하는 말일지 모르겠다. 듣기 좋은 말은 상하기 쉽고, 뼈아픈 말은 왠지 피와 살이 돌지 않는데. 이 말은 일단 배부터 불리는 말이자, 배고픈 시인보다 제발 배부른 시인으로 살라고 떠미는 말 같았다. 왠지 등부터 따뜻한 엄마의 말... 살찌는 인생이 기꺼워지고 있었다.


먹는 데 꿀리면 인생 전체가 꿀린다는 말.


이 말을 듣는 순간 어떤 절망의 순간에도 열렬히 먹어온 나의 인생을 비로소 응원할 수 있었다. 텅 빈 주머니로 차리던 황홀한 저녁상이 비로소 별자리를 찾은 것 같았다. 엄마한테 효도 한 번 못했지만. 아들 어찌 되었던 간에 잘 먹어야 한당께, 귀가 닳도록 들은 그 말을 오롯하게 실천해온 내 밥상들이 보였다. 월세를 내지 못할 지경에도 온갖 산해진미로 가득했 던 나의 밥상들. 홀로 빛나던 그 밥상은 차라리 허기 가득한 청춘의 반증이었지만, 나의 가난은 단 한 번도 배고프지 않았다. 진실로 가난을 멸시하여, 가난이 배부르도록 소홀해 본 적이 없었다.


인생이 뭣 같은데 배불러도 되는 것일까. 진지하게 물어도 진실로 배고픈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이라 믿었던 신춘문예에 떨어져도, 4년 사귄 애인과 결별해도, 어렵게 얻은 직장에서 권고사직을 당해도 나는 절망에도 진수성찬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뿐이었다. 어떤 절벽이 인생을 끌어당겨도 사람의 군침보다 못한 것이어서 아주 잘 먹고 있었다. 큰 그늘이었던 형이 죽어도 더운 육개장에 밥을 말아 먹을 뿐이었다. 죽은 나무로 한솥 끓여내는 육개장의 맛은 그야말로 죽여주었다. 나는 아마도 이 세상이 멸망한다고 하더라고 한 그릇의 국밥을 말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하여, 나는 절망의 한복판에 서 있는 사람에게 어떤 위로의 말보다 밥부터 산다. 국밥부터 말고 본다. 금방 죽을 것 같아도, 일단 뜨거운 숟가락을 훌훌 불다 보면 죽겠다는 마음보다 식히거나 삭히는 마음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마침내 속을 달래줄 한 숟가락의 온기를 만나면 죽겠다는 생각보다 일단, 먹자는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왜 먹고 죽는 귀신이 때깔이 좋은지 아는가. 그것은 마지막까지 나눌 체온이 있었다는 것. 먹고 사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적어도 죽지 않는 생을 꿈꾸어서 이승의 때깔이 저승에도 머무르는 것이 아닐까. 나는 새삼 이 처참한 인생에도 국밥을 마는 사람을 응원하고 싶어진다.


얼마 전 아내와 백 만년 만에 국밥을 말았다. 백 만년... 표현이 과해도 적확한 표현이었다.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고 꿈에도 먹지 못하는 음식이 있다면 국밥이었다. 술 좋아하는 아내와 나, 국밥은 안주이자 해장. 끝없이 술을 부르고 이해하는 장르가 국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술맛도 모르는 어린 것들이 생겨 없던 세계처럼 국밥을 등지고 살았다. 펄펄 끓는 국밥에 애들이 혹여나 위험할까. 오랜 벗이었던 국밥을 위험 음식으로 지정하고 아예 먹을 생각조차 안 했다. 그런데 어느덧 어린 것들도 커서 어른의 맛을 조금은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가만 생각해보면 아이 둘이 생기고, 못 먹는 음식은 수없이 많았다. 과일부터 끊어야 했다. 먹성 좋은 나까지 먹으면 식비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여전히 먹는 것에 진심이지만, 어떤 진심도 먹여야 하는 인생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흔히 애들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지 않냐고 묻는다. 나는 그럴 때마다 진심으로 그래도 내가 먹어야 배부르지 않겠냐고 답했다. 진실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이미 먹여야 하는 인생을 사랑하고 있었다. 어떤 가난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내가, 새끼들 입에 들어가는 음식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먹성 좋은 나만 좀 참으면 새끼들은 원없이 배부를 것 같아. 내 피와 살, 뼈까지 바꿀 것도 같았다.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을 더 믿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토록 잘 먹었으니, 이젠 잘 먹이는 인생으로 살아도 여한은 없다.


솔직히 모르겠다. 애들을 배부르게 키운다고 내 인생이 배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아빠의 진심을 버린다고, 이 세상에 진심을 주는 아이로 성장할 보장도 없다. 그런데 어찌 되었던 간에 잘 먹어야 한당께... 내 엄마의 마음을 닮아가는 것. 나는 그게 세상의 어떤 시인의 말보다, 사색 섞인 어떤 문장보다 아름답게 내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 움켜쥘수록 바랄 것 없는 가난처럼 뛰고 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입김이 뜨겁고, 잘 살라는 말보다 배가 부르다. 먹는 게 꿀리면 인생 전체가 꿀린다는 말. 나는 그 말에 꽂혀 더없이 배부른 인생을 꿈꾸겠지만. 아이들보다 배부른 인생은 살지 않겠다는 굉장히 가부장적인 생각을 해본다. 그게 진실이 아니라도, 어떤 아빠는 진실보다 오래 살아남아 밥상를 차렸다고 믿는다. 먹는 인생이, 진실로 산 인생보다 위대할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라면 먹고 갈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