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환한 미소' 그 때 그 미소를 잊을 수 없어 요리를 시작했다.
“야, 대가리, 너 걸을 수는 있냐?”
거울 보는 게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머리가 크고 이성이란 게 생기면서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친구들이 버릇처럼 내게 하던 말들이 나를 깔보고 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거울 속 내 모습은 왜소했고 몸에 비해 얼굴은 컸다.
그런 내 모습이 정말 싫었고 그때부터 사람을 대면하기가 두려워졌다. 모두가 나를 보면 수근 거리고 조롱할 거 같은 강박에 휩싸였다. 나는 자연스레 홀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고 그래서 어릴 적 친구가 거의 없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할머니가 나를 돌봐주러 집에 오셨고 마침 그날이 할머니의 생신이셨다. 평소 나를 아껴주시던 할머니를 위해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하루 용돈이 300원이었던 나는 당시 유행하 던 1,800원짜리 콜팝을 먹기 위해 모아뒀던 동전을 꺼내 슈퍼로 향했다. 그리고 엄마가 생일이면 끓여주셨던 미역국을 떠올리며 미역 한 봉지를 집어 들었다.
무턱 대고 미역은 사왔는데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미역과 물을 얼마나 넣고 만들어야 할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1봉지가 1인분이겠지?”
별 생각 없이 미역 1봉지 전부를 넣고 국을 끓였다. 결과는 참담했다. 미역은 삽시간에 불어났고 냄비 밖으로 역류했다. 그렇게 엉망진창인 미역국이 완성됐고 칭찬은커녕 할머니에게 혼날 줄 알았는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다.
할머니가 너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무덤 같은 미역국을 맛있게 드셔주셨다. 평소 내향적이고 소심한 나이기에 누군가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다는 건 난생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 할머니는 치매를 앓으시며 기억을 조금씩 잃어 가셨는데 그 와중에도 명절에 나를 보실 때 마다 우리 손자가 미역국을 끓여줬다는 자랑은 빼놓지 않으셨다.
나의 요리로 누군가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행복한 기억을 선물할 수 있다 는 것은 내게 정말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
그때 그 미소를 잊을 수 없어 나는 요리를 시작했다.
‘당신의 그 미소가 좋아서’
http://youtube.com/c/WanderingChef
더 자세한 영상과 저의 요리여행 에피소드 영상을 위의 유투브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올 12월 '당신의 그 미소가 좋아서'라는 요리 여행에세이가 출간 예정입니다.
브런치에도 좋은 글들로 찾아 뵐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