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한 전복
"꼭 뭘 해야 돼요?"
소녀 '녹양'(김주아)은 당돌하다. 되받아쳐 질문한다. '보희'(안지호)를 찍어서 뭐할 거냐는 말엔 꼭 뭘 해야 하냐고 묻는다. 궁금하면 못 참고 "아저씬 직업이 뭐예요?", 거슬리는 말엔 직격타다. "진짜 한심하게 생겨가지고, 누굴 보고 계집애래!" 이런 녹양이 옆에서 대신 안절부절, 때론 녹양 이를 부러워도 하는 소심한 소년이 보희다.
영화는 녹양이 표현으로 '불알친구'인 이 두 아이가 '보희의 아빠 찾기'에 나선 과정을 담았다. 엄마와만 사는 보희는 엄마가 돌아가신 녹양에게 "넌 적어도 버려지지 않았잖아"라고 하고, 녹양은 보희에게 "그래도 넌 아빠가 보고 싶으면 볼 수라도 있잖아"라고 말한다. 부모 중 한 명이 없는, 이 단짝은 각자의 결핍을 서로의 존재로 채워왔다. 제목부터 누구 이야기인지 명확하지 않나.
제목에 떡하니 담은 이름은 이 영화의 특징 중 하나를 보여준다. 그건 관습을 전복시킨다는 거다. 많은 관객이 녹양이 남자, 보희가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을 터. 물론 남자 이름, 여자 이름이 따로 있지 않대도 괜스레 "그럴 것 같다"는, 문화적으로 내면화된 인상이 있다. 나도 그랬다. 감독은 이를 의도한 듯하다. 보희는 극 중에서 개명하고 싶어 한다. 왜?
정답은 보희의 대사에 있다. "저도 녹양이처럼 되고 싶어요." 그러니까 씩씩함, 당돌함, 꿋꿋함 같은 과거 남자다움의 특질로 여겨지는 걸 자신도 갖고 싶다는 것. 왜소한 체구에 놀림을 받아도 참고 넘기는 보희는 같은 상황에서 일단 들이받고 보는 녹양이 멋져 보였을 거다. 보희란 이름을 바꾸고 싶은 이유도 같다. 심지어 녹양인 보희를 '보지'라고까지 놀리니까.
정상 가족의 의미도 마찬가지다. 보희는 사촌누나 '남희'(김소라)의 애인이자 고아인 '성욱'(서현우)에게 묻는다. "죽기 전 날이면 부모님이랑 있고 싶지 않을까요?" 아빠를 찾는 보희에게 이 말은 "양가 부모 잘 계시니?"가 한국 사회에서 의미하는 바와도 통한다. 부모의 부재가 그게 애정이든 능력이든 자식의 결핍과 직결돼 이해되는 문화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달리 간다. "내일 죽으면 좋아하는 사람이랑 있고 싶지, 왜 얼굴도 모르는 엄마 아빠가 보고 싶냐?"
이 영화가 성장 영화인 이유는 단순히 두 어린 배우의 성장담을 주제로 다뤄서가 아니다. 관객을 함께 성장시키기 때문이다. 영화 곳곳에서 일어나는 관습의 전복이 관객으로 하여금 내면화돼있던, 오래된 사고방식을 흔든다. 어? 왜 내가 보희를 여자 이름이라고 생각했지, 왜 '왈가닥' 녹양 이를 동경하는 보희 마음이 잘 이해되지, 가족이 꼭 엄마 아빠로만 이뤄지나, 와 같은 것들.
그래서 이 영화는 청량하다. 관습을 전복시킨 쾌감에서 오는 청량함. 오락 영화처럼 극적이진 않지만, 소소하게 그러나 섬세하게 찌르는 자극이 아릿하다. 그 자극을 느끼며 영화 끝까지 다다르면 보희도 성장해있다. 이제 보희는 이름을 바꾸고 싶어 하지 않는다. 아빠를 마지막으로 보러 가기 전 녹양에겐 말한다. "난 네가 있으니까." 녹양 이뿐 아니라 엄마와 성욱, 남희도 있다. 보희의 생일을 축하해주려 모인 이들의 모습은 아빠의 부재에도 충분히 완전한 가족처럼 보인다.
<보희와 녹양>의 오프닝은 독특하다. 보희와 녹양이 함께 보는 영화가 끝나야 시작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 영화가 끝나야 비로소 두 주인공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같은 맥락에서 <보희와 녹양>이 끝난 후, 관객 개별의 영화도 시작될 거다. 오그라들지만 사람 모두 자기 영화의 주인공이란 말도 있지 않나. 이때 영화 속 보희처럼 관객도 성장해있다면 좀 더 청량한 기분으로 영화를 찍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