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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Feb 15. 2021

115. 영화 <도희야>

"넌 이름이 뭐니?" 


이 ㄴ-X, 저 X이 아니라 이름을 물어주고, 불러준 사람, 도희(김새론)에겐 영남(배두나)이 유일했다. 영화 <도희야>의 영어 제목은 'A Girl at My Door'다. 매 맞는 소녀 '도희'는 '영남'이 제 이름을 물었던 날, 그 이후부터 영남 곁을 맴돌고, 그러다 현관문을 두드린다. 맨발에 피투성이가 된 채로 말이다. 영남은 그런 도희를 품어준다. 제 문 앞의 소녀를 집 안으로 들인 것이다. 


왜 영남은 도희를 내쫓지 않았을까? 경찰이자 한 어른으로서 아동학대를 방관할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 또한 설득력 있지만 그보다 영남도 폭력의 피해자다. 영남이 시골 마을 파출소장으로 좌천된 건 그녀가 레즈비언이기 때문이었다. 성소수자에 가해지는 세상의 폭력에 무력했던 영남은 도희에 제 처지를 투영해보았을 것이다. 


이처럼 약자-어른이 약자-아이의 고통에 공감하고, 도우려 애쓰는 연대 서사는 김혜수 주연의 영화 <내가 죽던 날>과 비슷하다. <내가 죽던 날>에서 형사 이혼과 직장 내 징계에 지친 형사 '현수'(김혜수)가 우연히 실종사건을 다루게 되고, 피해자 '세진'(노정의)에게서 제 모습을 발견한다. 차이가 있다면 <내가 죽던 날>보다 <도희야>가 좀 더 왜 약자-어른이 아이에게 깊이 공감하는지 그 배경이 좀 더 친절히 설명된다는 점이었다.


김혜리 평론가는 이 영화가 좋았던 이유로 캐릭터가 '접고 들어가지 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약자가 어떠한 도덕적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을 깬다는 점에서다. 동의했다. 레즈비언인 영남은 물통에 소주를 담아 마시는 알코올 중독자고, 아동 학대 피해자 도희는 영악하게도 아버지를 성폭행범으로 모는 '작은 괴물'이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영남이 마을을 떠나며 도희에게 "나랑 같이 갈래?" 묻고, 두 사람이 같이 울며 포옹하는 장면에서 감동보다 우려가 앞섰다. 상처를 가진 이들이 서로를 껴안아 함께 살아가는 일은 너무나 위안이 되는 일이지만 이 두 사람의 미래가 과연 밝기만 할까 싶어서다. 특히 깊은 상처를 가진 도희가 자라 아버지에게 했듯 어떤 일을 벌일지는 알 수가 없는 일 아닌가. 


영남과 도희가 마을을 떠나는 날엔 비가 온다. 비를 가르며 달리는 영남의 차를 비추는 장면은 불확실한, 그저 아름다울 수만은 없는 미래를 보여주는 듯했다. 잠든 도희를 바라보는 영남의 눈길도 같은 우려를 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영남은 도희를 껴안았고, 도희는 영남 곁에 있다. 자기 자신보다 타인을 걱정하는 마음이 '사랑'이고, 그게 사람을 살게 한다고 톨스토이는 말했다. 죽지 못해 사는 듯 우울하던 영남의 삶에 도희를 향한 사랑이, 어쩌면 사는 이유가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일에 언제나 맑음만 있을 순 없다. 비가 오고 천둥이 치는, 흐리고 어두운 나날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나랑 같이 갈래?"라고 말하던 때에 이미 영남은 그런 나날도 감당할 생각이었지 않았을까. 신형철 평론가는 "사랑해"라는 말은 곧 "나는 결여다"와 동일어라고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듯 부족하고 상처 많은 이 둘이 사랑하며 살기를, 엔딩신에서 멀어져 가는 영남의 차를 보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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