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수학능력고사라는 시험을 치고 대학생이 되었다.
2번의 수능을 치고 '안전한 지원'을 하고 대학생이 되었다.
졸업할 무렵 IMF 상황이 되면서 전공과 상관없이 은행에서 사무직으로 2년 7개월을 일을 했다.
27살이었던 어느 날, 문득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것이 뭐였지?'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 좋아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를 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랐다.
그리고 원래 가고 싶었던 '유아교육과'를 기억해냈다.
학사편입으로 다시 대학에 진학을 하게 되었다.
그 때 나의 꿈은 “내 나이 마흔살에 아파트 1층에서 어린이집을 해야지”였다.
1학년 2학기 수업을 듣던 중 '특수아동의 이해'라는 과목을 수강하게 되었다.
'특별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생각의 끝에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었다.
자격을 갖추기 위해 연수를 들으며 시험에 합격을 하고 언어치료사가 되었다.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면서 부족한 부분들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다시 대학원에 진학을 해서 '언어치료'를 전공하게 되었다.
언어치료사가 된지 벌써 20년이 되었다.
조금은 특별한 아이들과 함께 하는 언어치료사는 너무나 매력적인 직업임을 날마다 느끼며 일하고 있다.
발음이 좋지 않아서 언어치료를 받는 아이도 있고, 말을 더듬어서 언어치료를 받으러 오는 아이들도 있다.
요즘은 '발달장애' 또는 '자폐스펙트럼'이라는 진단을 받고 찾아오는 아이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
처음에는 말을 잘 못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욕구를 표현하지 못하던 아이들이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비언어적인 표현이지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 모습을 볼 때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에 대한 보람을 느낀다.
더 큰 보람은 그런 자녀의 변화를 통해 웃음을 찾는 엄마들의 모습이다.
전공을 바꿔서 학사편입을 하고 대학원에 진학까지 하며 가지게 된 언어치료사라는 직.
미혼일 때 시작한 이 일은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도 보람된 일이었다.
지금은 1인 언어치료실을 8년째 운영하며 더 즐겁게 아이들과 엄마들을 만나고 있다.
민간자격증으로 시작된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은 몇 년 전부터는 보건복지부에서 국가공인자격증이 되었다.
그리고 언어치료사라는 명칭이 언어재활사라는 명칭으로 변경이 되었다.
언어치료사라는 직업을 알게되고 '준자격증', '2급 자격증', '1급 자격증'을 획득한 후 모든게 끝난 줄 알았다. '끝날때까지는 끝난게 아니다'라는 말처럼 국가공인 자격증으로 전환이 되면서 다시 특례시험을 치게 되었다. 그 시험을 통해 현재는 1급 언어재활사가 되었다.
문득 생각을 해 본다.
처음에 꿈꾸었던 '내 나이 마흔살에 아파트 1층에서 어린이집을 하고 싶다'라고 마음에 남겼던 작은 점.
그 점이 지금은 언어재활사라는 직업의 동그라미가 된 것 같다.
그리고 언어재활사로 살아온 20년이라는 시간이 지금은 1인 언어치료실 <온맘>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8년의 시간을 거쳐 1인 언어치료실 온맘에서 저만의 색깔을 칠해가는 언어재활사로 일하고 있다.
언어재활사로 살아가는 제가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