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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식문화진흥 Dec 05. 2020

종로 설렁탕, 마포 돼지갈비 그리고 장충동 족발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 

왜 종로통에는 오래된 설렁탕, 해장국 집들이 많을까? 

마포 일대에는 노포 설렁탕집, 돼지갈비 전문점들이 많다. 무슨 이유일까? 


의문은 이어진다. 장충동의 족발, 냉면은 어떤 역사를 가졌을까? 왜 평양냉면, 족발이 장충동에서 널리 유행하고, 전국으로 퍼졌을까?


음식의 역사는 도시의 역사다. 서울의 음식, 맛집도 마찬가지다. 시장과 도시를 따라 생겼다. 맛집은 도시에 남았다. 맛집은 도시에 남은 화석이다. 


종로통은 서울의 중심이다. 서울의 중심은 조선의 궁궐들이다. 궁궐을 따라 도시를 설계했다. 조선의 건국 직후였다. 600여 년 전이다. 삼봉 정도전(1342~1398년)은 한양을 설계했다. 궁궐을 세우고 궁궐 주변으로 도로를 그렸다. 경복궁에서 남대문을 잇는 큰길을 만들고, 지금의 종로통에 육의전 거리를 그렸다.


육의전은 궁궐에 사용할 물건을 납품했다. 궁궐 바로 앞에 큰길을 만들고, 정부의 주요한 부처들을 세웠다. 경복궁 앞 큰길, 오늘날 세종문화회관과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언저리다. ‘육조(六曹)거리’다.


육조거리 가까운 곳에 ‘국가 공인 시장’을 세웠다. ‘육의전(六矣廛)’이다. 육조비전이라고도 한다. 옷감부터 생선까지 생필품을 궁궐에 납품했다. 더불어 전국의 각종 생산물을 모으고. 내보내는 일을 했다. 종로 육의전은 조선의 상업 중심지였다. 물건을 매매, 거래하는 일은 이들만이 할 수 있었다. 


육의전은 독점적인 전매권을 가졌다. 공식적인 시전(市廛) 상인들이다. 육의전 이외에는 누구도 함부로 물건을 사고, 팔지 못했다.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비공식적인 난전(亂廛), 사상(私商)들을 단속할 권리를 가졌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다.


금난전권은 신해톻공(辛亥通共, 1791, 정조 15년)까지 유지되었다. 금난전권이 사라지면서 시전 상인들의 특권은 허물어진다. 약해졌지만, 종로 육의전 거리는 살아남았다. 

장충동 족발. 한눈에 보아도 먹음직스럽다.

경복궁과 종로통 사이에는 피맛골이 있다.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에 육조거리, 피맛골에 간단한 사설 시장이 들어선다. 육의전에서 다루지 않는 땔감, 나물 등을 주로 다뤘다. 땔감은 육의전에서 다루기에는 부피가 크다. 삼청동, 가회동 일대의 지체 높은 반가에서는 땔감을 구한 다음, 집이나 한강 변에 쌓아 두었다. 나물도 마찬가지. 조선 후기에 이미 왕십리 일대에서 나물을 기르는 전문 농부가 있었다. 나물은 상하기 십상이다. 주로 피맛골 일대의 빈터에서 거래되었다. 


일제강점기를 전후하여 피맛골 일대에는 설렁탕, 해장국을 내놓는 작은 가게들이 들어선다. 오늘날 대중음식점의 시작이다. 


한반도 식당의 시초라는 종로통 ‘ㅇ’의 경우 1903년 무렵 문을 열었다. 을사늑약 직전이다. 해장국 집의 시작인 ‘ㅊ’ 역시 1937년 문을 열었다. 누가 주 고객이었을까? 유명 설렁탕집의 고객들이 종로 주변의 건달들이었다는 이야기는 사실이다. 그들만 드나든 것은 아니다. 주 고객은 이른 새벽, 나물, 땔감을 가지고 한양 도성(경성)으로 들어왔던 사람들이다. 해장국 집은 해장을 하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요기를 위한 장소다. 


이른 새벽, 한양 도성으로 땔감, 나물을 가지고 들어온 가난한 이들은 미처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다. 무거운 짐을 부려놓은 다음, 간단한 요깃거리를 찾는다. 소뼈, 부산물을 넣고 푹 곤 설렁탕이나 배추 우거지, 선지를 넣은 해장국은 요깃거리로 안성맞춤이다. 양이 넉넉하고, 영양도 풍부하다. 가격도 싸고 후딱 내오고, 훌훌 먹을 수 있다. 밥 한술 말고, 막걸리 한잔 곁들이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해장국이 아니라 술국이다. 


설렁탕에 각종 부산물, 선지, 내장 등이 포함된 이유도 간단하다. 선지가 들어가면 선지해장국이고, 가격이 싼 소 대가리의 여러 살코기가 들어가면 소머리국밥이다. 내장이 들어가면 내장탕이다. ‘ㅇ’ 설렁탕에는 지금도 소 지라나 우설(소 혀)이 남았다. 살코기, 정육이 아닌 소 부산물, 즉 허드레 부위다. 가격이 싼 서민들의 대중적인 음식이다. 비싼 부위를 사용할 수 없다. 선지, 허드레 고기, 배추 우거지 등을 사용하는 이유다. 


육조거리, 경복궁을 드나드는 이들은 고관대작들이다. 지체 높고 부유한 사람들이다. 육의전도 마찬가지다. 돈 많은 이들, 힘센 이들이 드나든다. 일반 서민들은 말을 탄 고관대작들, 지체 높은 이들, 돈 많고 힘센 이들을 피한다. 만날 때마다 머리를 조아리고 때로는 땅바닥에 엎드려야 한다. 힘센 이들과 말을 피하려고, 피마(避馬) 하기 위해서 숨어든(?) 곳이 오늘날 피맛골이다. 


한반도의 설렁탕, 해장국 등 서민적이고 대중적인 음식들은 종로 피맛골을 중심으로 번창한다. 종로가 아니라, 종로의 뒷골목, 피맛골이다. 


마포의 역사도 종로통에 못지않다. 종로가 한양 도성의 중심지에 있었다면 마포는 한양 도성 바깥의 항구였다. 예나 지금이나 항구는 상업의 중심지다. 목포뿐만 아니라 마포도 항구였다. 수도 한양에 물자를 공급하는 가장 큰 항구였다. 


한강에는 여러 개의 ‘호수’가 있었다. 행주대교 부근의 행호(杏湖), 동호대교 부근의 동호(東湖)가 있었다. 호수같이, 물이 넓고 깊은 곳들이다. 마포대교 부근에는 서호(西湖)가 있었다. 오늘날 서강이다. 


마포, 용산은 동호와 서호의 사이에 자리한다. 마포는 마포나루였다. 마포대교는 1970년 완공되었다. 그 이전 1960, 70년대까지도 마포는 여전히 마포나루 터였다. ‘마포 새우젓 장사’ 마포나루에서 시작되었다. 새우젓은 젓갈 중에서도 흔하다. 많이, 주로 다루는 품목이다. 새우젓을 파는 이들의 숫자도 많다. 마포 새우젓 장사가 생긴 이유다.         


마포나루를 통하여 호남, 충청의 산물들이 한양 도성으로 들어왔다. 국가 세금인 공물도 마찬가지다. 호남, 충청의 산물들, 공물이 내륙의 강이나 서해안을 따라 올라온다. 한강을 거슬러 마포에 도착하여 짐을 내린다. 조선 시대에는 마포, 용산 일대에 서민들이 많이 살았다. 한양 도성에서도 제법 떨어진 곳이다. 부둣가이니 허드레 일거리도 많다. 강을 터전 삼아 물일, 선박 운송 관련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이었다. 나루터는 가난한 이들이 살기에는 좋다. 별 재산이나 재주 없이, 육체노동을 하면서 살 수 있다. 


서민들이 사는 지역이다. 각종 농수산물의 유통이 이루어진다. 상인들도 많이 몰려든다. 싼 물건을 구하려는 소비자들도 몰려든다. 물건이 유통되고, 사람이 모이면 시장이 선다. 시장에는 파는 이와 사는 이들, 중개하는 이들이 모인다. 이들이 밥 한술, 술 한 모금 마실 장소가 필요하다. 대중적인 음식점들이 생긴다.


역시, 마포에는 설렁탕 노포도 있고 돼지갈비를 내놓는 집들도 많다. 양념한 돼지갈비는 마포가 원조다. 


마포의 노포 ‘ㅊ’ 돼지갈비는 마포가 나루터였던 마지막 시절, 1950년대 중반에 문을 열었다. 마포나루 시절에는 이 언저리에 설렁탕, 해장국 집들이 있었다. 돼지고기가 조금씩 흔해지던 시절, 가장 가격이 싼 부위인 돼지갈비를 파는 곳이 생겼다. 미포 돼지갈비의 시작이다. ‘원조’를 내세우는 이유는 이 언저리에 돼지갈빗집이 많았고 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포 원조’를 내세우는 집들은 전국으로 널리 퍼졌다.  


장충동 일대의 냉면, 족발은 한국 전쟁 피난민들이 시작한 음식이다. 처음부터 기획한 음식은 아니다. 가난한 피난민들이 집 한 귀퉁이를 열어서 작은 가게를 세웠다. ‘기획형’이 아니라 ‘생계형’이다. 오늘날 냉면, 족발의 시작이다. 

장충동 평양냉면.

평양냉면은 일제강점기에도 경성(한양)에서 널리 유행했다. 평양, 평안도에서 온 이들이 경성에 냉면 집을 열었다.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평양냉면을 서울에서 선보였고, 널리 유행시켰다. 


한국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피난민들이 대거 남쪽으로 내려왔다. 서울은 이미 포화 상태였다. 장충동 일대는 서울의 외곽지역이었다. 동남지역의 마지막이다. 남산 언저리는 아직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피난민들은 서울의 외곽지역, 버스와 전차의 종점 언저리에 자리를 잡았다. 장충동이다. 오래지 않아 체육관이 들어섰다. 장충체육관은 서울의 외곽은 사람들이 많지 않은 남산 기슭이었다. 


남쪽에는 냉면도 족발도 흔하지 않았다. 냉면을 뽑고, 족발을 삶았다. 족발은 우리 시대의 음식이다. 피난민들은 북쪽에서 흔히, 자주 먹던 음식이었다. 오향장육(五香醬肉)은 중국에서 널리 유행한 음식이다. 돼지 살코기 대신 돼지 족발을 장에 담가서 조리하면 오향장족(五香醬足)이 된다. 한반도의 북쪽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었던 음식이다. 돼지 족발은 역시 허드레 부위다. 돼지 부산물이다. ‘족발’ 혹은 오향장족이라고 이름 붙인 음식은 이전에는 없었다. 중국 음식을 본떠서 한반도식으로 변형한 것이다. 


가난한 피난민들이 비교적 싸게 구할 수 있는 족발을 요리했다. 마침 장충체육관이 문을 열면서 북쪽 음식 냉면과 족발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전국적으로 유명한 평양냉면과 족발이 장충동에서 시작되었다. 


한반도는, 서울은 전 세계 음식의 용광로다. 많은 외국의 음식, 식재료가 한반도로 들어왔다. 서울은 숱한 외국 음식, 식재료를 용광로에 넣고, 섞고, 비비고 끓였다. 새로운 음식, 한식의 시작이자 진행형이다. 


설렁탕은, 소의 부산물을 이용한 국물음식, 탕(湯)이다. 곰탕은 쇠고기 정육을 끓인 국물, 대갱(大羹)이다. 설렁탕은 대갱의 한반도 형이다. 대갱을 본떴으나 한반도의 고유의 음식이 되었다. 


국수도 중국에서 건너왔으나 우리는 메밀로 차가운 국수를 만들었다. 어느 나라나 차가운 국수를 먹는다. 한반도의 냉면은, 이제, 한반도 고유의 한식이 되었다. 족발도 마찬가지. 중국의 돼지고기 음식, 오향장육에서 비롯되었으나 족발은 한반도 고유의 음식이 되었다.


돼지갈비는 계륵이다. 먹기에는 뭔가 부족하고, 버리기에는 아깝다. 외국에는 폭립(Pork rips)이 있으나 우리는 한반도 형 양념 돼지갈비를 만들었다. 마포 돼지갈비는 특이한 음식이다. 폭립과 닮았으나 마포 돼지갈비는 ‘즉석 형 음식’이다. 특이하다. 


한식은 끊임없이 변화, 발전하다. 꾸준히 바뀌는 것이 한식의 특질이다. 서울, 시장, 음식의 변형을 보면 음식과 역사가 보인다.  


우리 시대에도 한식은 여전히 진화한다. 서울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본 글은 황광해 음식 칼럼니스트가 2020년 3월부터 한국음식문화 누리집에 게재 중인 정기칼럼 내용입니다. 황광해 칼럼니스트의 주요 저서로는 <한식을 위한 변명>(2019), <고전에서 길어올린 한식이야기 식사>(2017), <한국맛집 579>(2014) 등이 있습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한식문화진흥사업의 일환으로 매주 한식에 대한 유용한 칼럼을 소개합니다. 내용에 대한 문의는 한식문화진흥사업 계정(hansikculture@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본 칼럼은 한국음식문화 누리집(www.kculture.or.kr/main/hansikculture)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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