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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Mar 09. 2024

링거를 맞고 방송을 만듭니다.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상황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임박해지자 갈려있던 양대노조가 힘을 합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직원들과 직원들의 가족들이 탄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나는 두 번째 탄원서를 썼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서울시장님, 서울시의장님, 그리고 서울시의원님.

저는 000 라디오제작본부에서 일하고 있는 000PD입니다.


2024년이 시작된 지 어느덧 첫 한 달 반이 지났습니다. 올해의 첫 달을 어떻게 지내셨나요?

개인적으로 저는 굉장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회사가 재정적으로 어려워지자 제가 담당하고 있는 프로그램은 1만 원의 출연료로 손님을 초대하며 의리 방송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그마저도 없어 제가 직접 방송에 출연하고 원고를 작성하고 취재하고 편집하고 연출까지... 1인 5역을 하며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피로 누적에 링거를 맞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가장 힘든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000 라디오를 듣는 청취자들 중에는 저보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삶의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루 12시간 운전해도 월 소득 200만 원이 넘지 않는 직업 운전자,

시장 끝자락에서 호떡과 어묵을 팔며 꼬깃꼬깃한 지폐를 모으는 소상공인,

폐업 위기에 맞닥뜨린 노래방 사장님까지 이분들은 온종일 000 라디오를 들으며 시름을 달래고 계십니다.

청취자들은 지금도 000의 위기를 보며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 '내가 개국 때부터 들었는데 이대로 사라지면 안 된다"라며 저희를 응원하고 계십니다.

저는 30년이 넘게 000을 들으며 위로받고 힘을 받던 청취자들을 생각하며 다시 기운을 냅니다.


라디오를 듣는 분들은 대체로 따뜻한 분들입니다. 라디오에는 정치 시사 프로그램만 있는 게 아닙니다. 000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따뜻한 프로그램도 많습니다.

그리고 000 라디오는 유독 생계 전선에서 뛰어들어 하루하루 열심히 일하는 소상공인, 평범한 소시민들이 챙겨 듣는 방송입니다.

000가 사라진다면 그분들은 어디서 위로를 받을까요?


저는 앞으로도 청취자들에게 힘이 되는 방송, 위로가 되는 따뜻한 방송을 만들고 싶습니다.

저희 동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쪼록 000 라디오가 서울시민에게, 더욱이 힘이 없는 서민들에게 행정적 절차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

000 직원들도 서울시민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헤아려주시고 30년 넘게 이어온 방송이 멈추지 않도록 숙고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탄원서를 낸 후에도 떠나는 동료들의 작별인사가 계속 올라왔다.


인사 말씀 올리고 갑니다.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을 직접 찾아뵙고 인사드리지 못해 송구합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개막일 바로 전날 첫 방송을 시작했습니다.
방송을 앞두고 떨리던 그때의 마음이 지금도 생생하네요.
교통리포터였지만, 광화문 어딘가, 한강다리 어딘가에 피디님들, 엔지니어 감독님들과 함께 중계차를 타고 나가
현장리포팅을 하던 기억들이 생생합니다.   
명절특방 때마다 더 긴장하면서, 24시간 밤새서 근무했던 기억들도 많이 나고요,
서로 근무지가 떨어져 있고, 교대근무라 자주 볼 수도 없었던 리포터님들도 너무 고마웠습니다.
지금도 너무 고생하고 계시는 라디오본부 팀장님 이하 피디님들 감사했습니다.
아나운서님들, 방송엔지니어 감독님들도 너무 감사했고 보고 싶을 거예요.ㅜㅜ
직원들 처우개선을 위해 힘써주셨던 노조집행부의 노고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저는 비록 지금 떠나지만 마음은 늘 000와 함께 할 겁니다. 파이팅~!!!


저도 오늘을 끝으로 퇴사하네요. 몇몇 분들께는 따로 인사드렸지만, 일일이 찾아뵙지 못해 저도 이 창에 인사 남겨봅니다. 남산 시절부터 15년 넘게 000에서 일하면서 언론노조 000지부의 탄생과 재단 전환 등 자랑스럽고 기쁜 순간을 함께 할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고 직원들 스스로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 건 너무나 안타깝고 착잡하지만 뭔가를 바꾸고 이뤄냈던 경험이 힘이 되어주리라 믿습니다. 이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000 정상화를 간절히 바라고 응원하겠습니다. 다들 건승하십시오.


영화 해바라기, 김래원의 대사가 많이 생각났다.

"꼭 그렇게까지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그러나 읍소할 뿐이었다. 그게 동료들에게도 해가 되지 않고, 유일하게 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행동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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