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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Mar 12. 2024

버티기 버티기 버티기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항상 이 회사가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이직을 염두한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이 회사에 들어와 맨 땅에 헤딩이라는 열정만으로 혼자 맡은 주말프로가 40위권에서 5위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며

'어라? 되는데? 하면 되겠는데?'

라는 자신감을 갖게 됐다. 원래 지키는 자가 좇기는 자보다 불안한 법. 철옹성 같던 메인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비집고, 기어코 프6로그램을 자리 잡게 하는 재미에 들린 후로 나는 이직에 대한 갈망을 잊었다.


꽃은 옮겨 다니며 피지 않는다


비겁한 변명 같지만 나는 이 문구를 한동안 읊조리면서 '이곳에서 만개하리...' 하고 다짐했다. '내가 회사를 옮기더라도 여기서 인정받고 옮기리라' 비장한 각오도 있었다. 그런데 아뿔싸. 이제 11년 차가 되고, 여기저기서 인정 좀 받기 시작할 때가 되니 회사가 문 닫을 위기에 빠졌다.


'회사에 좌편향 인사가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이 계속 제기되면서 내부에서도 정리(?)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자 한 후배가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회사에 000 빼면 뭐가 있어요?(없어요)"


나는 그 말이 싫었다. '뭐가 있냐니? 네가 뭐가 돼야지!'

세게 쏴 붙이고 싶었다만 좋은 선배는 되고 싶은 애매한 욕심이 있어서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진 못했다. 하지만 후배의 태도가 지나치게 의존적이며, 그런 태도로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말이 반은 맞는 것 같다.


우리 회사가 뭐가 없다는 말이 요즘처럼 실감될 때가 없다. 


일단 이곳은 소유 건물이 없다. 한마디로 자산이 없다. 현재 좋은 이미지도 없다. 상업광고를 허용받은 방송사도 아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이미지도 나쁘고, 상업광고도 허용된 채널이 아니라 살 만한 기업이 나타날 리 만무하다.


결국 이 조직의 존망은 정치적인 상황에 달려있는데 그것 때문에 늘 낙하산을 받고,  심지어 윗분들의 선곡까지 성실하게 반영해 왔던 것이다. 그럴 때 제작 PD들은 뇌를 집에다 두고 와서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말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자괴감이 들었다. 그렇게 위의 요구에 순응해야만 하던 시절만 겪다가 법인화 이후 처음으로 마음껏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시기가 왔다. 아마도 너무 신나서 균형감각을 잃었던 것일 수도 있겠다. 청취율 1위도, 채널 청취율 2위도 다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이런 큰 일을 낸 PD는 벌써 이 조직의 한계를 절감하며 떠났는데 그 후 몇 년을 이 조직은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었다.


지나치면 역풍을 맞기 마련이다.  


뭐든 지나치면 역풍을 맞는다. 결국 모든 일은 순리대로 가게 되어있다. 지금의 이 사태를 보아하니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그건 반대로 이 조직에게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지금 이 조치가 지나치면 그것 또한 역풍이 불기 마련이다. 물론 지나침의 정도를 내가 감히 정확하게 가늠할 순 없다. 하지만 방송국이라는 존재를,  또 300여 명의 생계를 이렇게 끊어내는 것에 지나침은 없는 것인지. 나는 이 바람의 결과를 아주 관심 있게 주시하며 살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방송국이 문을 닫는 사상초유의 순간이 온다면 그 순간을 끝까지 목격할 생각이다. 그러니 지금은 버티겠다. 지금까지도 버텼는데 몇 달을 못 버티랴. 맷집이 생기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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