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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Mar 20. 2024

돈이 없어서 맨손으로 돌산을 오른 그녀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어느 날, 제작 팀장님께서 혹시 새벽 방송의 대타를 해줄 수 없느냐고 물으셨다. 새벽 6시~7시 방송을 하는 후배가 피로 누적을 호소한다고. 그런데 그 후배는 프로그램을 기획만 하는 게 아니었다. 직접 방송도 진행했다. PD이자 DJ인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그런 형태를 PDJ라고 불렀다. 인력공백을 어떻게든 창의적으로 이겨 나자는 아이디어의 일환이었다. 고로 나도 방송도 진행을 해야 하는 것이었다. 대안은 없었다.


이른 시간이지만 나는 회사에서 내가 뭘 하는지 잘 모르는 시간인 게 마음에 들었다. 그 시간에 본부장님이 방송을 모니터를 할 것인가, 누가 방송 듣고 질책을 할 것인가. 나는 이참에 회사의 상황을 알릴 수 있는 방송을 기획해 보기로 했다. 그래서 만든 게 ‘한번 더 나에게 폭풍 같은 용기를’ (직원 초대석)이었다. 그냥 직원을 부른 건 아니었다. 그녀는 제작비가 없지만 뭐라도 볼 만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돌 산을 오른 TV제작본부 소속 젊은 PD였다.      


https://www.youtube.com/watch?v=zOwWHHLDKfI

등반다큐 ‘넘어져도 괜찮아’      


제작비가 없자 TV제작본부에서는 돈 안 들이고 만들 수 있는 거리(?)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래서 젊고, 운동 좋아하는 여자 PD를 내세워 암벽을 등반하는 다큐를 찍은 것이다. 목표가 정해지면 일단 돌진하던 그녀는 회사의 위기도 알리고, 어려운 시기에 재미있는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선배들의 꼬드김에 속아 맨 손으로 돌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사의 위기를 오가는 커다란 돌벽 위에서 속으로 수없이 쌍욕을 뱉었다고. 급기야 그녀의 아버지는 “아무리 회사가 어려워도 왜 꼭 네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며 답답함을 토로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진심으로 제작비가 없어도 좋은 콘텐츠를 만들어 내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TV제작본부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대망의 라디오 출연일. 첫 라디오 방송 출연이었을 그녀는 너무 말을 잘했다. 나와 그녀는 마이크 앞이었지만 진심으로 대화했기에 때로 목이 메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아직 꿈이 있습니다. 좋은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꿈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리고 새벽 6시~7시 방송을 듣던 많은 청취자가 우리를 응원했다. 적어도 그 시간 그 스튜디오에서만큼은 우리는 청취자의 응원을 보며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부풀었었다.      


그런데 며칠 전, 그녀의 희망퇴직 소식이 내게 전해졌다.      


그녀도 끝내 배에서 먼저 내리기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녀의 소식을 듣고, 그날 방송 후, 재미와 희열에 방방 뛰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따뜻하고 무해한 콘텐츠를 만드는 게 평소 꿈이었다며 그날 라디오 방송이 자기가 추구하던 방송 같다고 말했다. 나중에 라디오를 소재로 콘텐츠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도 했다. 동그란 눈으로 신나 하던 그 친구는 마지막엔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라디오제작본부 후배 2명이 회사를 떠났다. 한 명은 희망퇴직, 한 명은 이직. 회사의 여건만 괜찮았다면 아직 꽃 피울 게 많은 친구들이었다.      


행복의 비결은 자유이고, 자유의 비결은 용기이다. -캐리 존스-      


선배들이 용기 있지 못해서 후배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떠나보낸 그 친구들이 나는 너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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