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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Mar 22. 2024

최저시급을 받던 MC를 보내며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어느 날, 한 선배님이 나에게 프로그램을 같이 해보지 않겠냐며 제안하셨다. 2018년 어느 오후였다. 그분은 내가 아는 부장님 중에는 가장 재미있는 부장님이셨다. 그날 부장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난다.


"내가 오체투지 하는 마음으로 지금 이 프로그램을 하고 있어"


오체투지..... 풉. 그분은 생각보다 이 프로그램이 힘들고, 진행자가 쉽지 않다며 삼보일배, 오체투지 등의 단어들을 써가며 그래서 나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초대된 프로그램의 회식자리. 이 분은 내게


"네가 맡았던 프로그램 청취율, 애들은 시간대가 그래서 잘 나왔다고 그러는데, 나는 그렇게 안 봐. 네가 잘한 거거든. 앞으로 기대가 된다. 잘 부탁한다"


그러며 사이다와 막걸리를 섞어주셨다.  그 꼬임에 넘어가 나는 4년을 넘게 그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프로그램 시간에 나오는 모든 로고가 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었다. 한 번은 어느 인디밴드에 "계란이 왔어요. 싱싱한 계란이 왔어요" 이 부분을 "일구가 왔어요. 싱싱한 일구가 왔어요"라고 개사를 해서 로고를 제작해 달라고 제안했더니 인디가수가 내게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사람한테 싱싱하다고 그래요...."


나는 순간 그 순수함에 어안이 벙벙해져 박장대소 후, 무조건 '싱싱한 일구'라고 하셔야 한다고, 나이가 있는 분이라 그게 더 재밌다고 밀어붙였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미운오리새끼에서 활약하고 계신 배우 임원희 씨가 출연한 영화 다찌마와리의  예고편을 패러디해


"스피커를 뚫고 나오는 박력과 흥분

듣지 않고는 믿을 수 없는 소문

라디오 역사 초유의 황금 같은 사나이

(최일구) 우리 사이에 통성명은 필요 없을 것 같은데

허리케인라디오, 절찬리 상영 중"


이란 로고를 만들었을 때, 모두가 어이없어했다. 그리고 한동안 그 로고가 나갈 때 스튜디오를 오가는 아나운서, 기자들도 지나가며 웃던 장면이 생각난다. 그 외 수많은 게스트들, 코너들. 마지막엔 직접 쓰던 원고까지. 나는 육아휴직 1년 반을 제외하고, 거의 5년이라는 시간을 이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그 사이 나는 서른 중반을 넘어 후반이 됐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  미우나 고우나 이 프로그램을 함께 한 진행자님과 부장님, 그리고 선배님들과 스튜디오에서 함께 웃고, 눈물도 훔치고, 예민해지기도 하고, 싸우기도 했다.


어느 날은 주말에 녹음으로 나가던 코너를 생방으로 갑자기 하게 되면서 '큐점', 즉 진행자의 마이크에 on을 하는 타이밍을 엔지니어에게 내가 잘못 말했다. 그러다 보니 진행자의 말과 코너 소개할 때 나가는 코드에 미리 녹음돼 있던 소개 멘트가 뒤섞여 두 사람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나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러자 부장님은 내게 노발대발하시며


"이러면서 네가 작가들한테 원고 가지고 뭐라고 할 자격이 있어?!!!!!!"


들고 있는 물병까지 바닥에 내팽개치고, 스튜디오를 뛰쳐나가셨다. 다들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놀라 할 말을 잃은 사이. 그 상황에서 어쨌든 남은 방송만은 무탈하게 끝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표정 하나 안 바꾸고, 버틴 기억이 난다. 그 후 사무실에 내려가 항의성 오열을 하며, 부장님의 사과를 받았다. 사실 부장님이 사과를 해주신 것이다. 속으로는 부장님이 화를 내실만 했다고 이해했다. 그만큼 프로그램에 진지하신 거니까. 그렇게 제작하던 프로그램은 주중 청취율 20위권, 주말 청취율 5위권에 들기도 했다. 이달의 PD상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내 30대 청춘을 이 프로그램과 함께 했다.


그런데 결국, 7년 차 이 프로그램도 닫게 됐다. 


제작비가 없었고, 누군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말도 들렸다.


그동안 교통비도 안 나오는 출퇴근을 하신 진행자는 마지막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려 최선을 다했다. 울지 않으려 참는 바람에 눈이 벌게져서 2시간 내내 청취자의 인사를 읽었다. "이렇게 없어지기에는 너무 아까운 프로그램", "이제 2시에는 무엇을 들어야 하나요" , "첫 방송부터 지금까지 들었는데 눈물 납니다" 많은 문자를 이를 악물며 소개했는데 결국 제작진을 대표한 나의 편지를 듣다가 눈물을 훔치셨다.


편지의 내용은 대략 이랬다.


앵디(=앵커디제이)님 안녕하세요.

앵디 님께서 TBS 사무실 처음 등장하셨던

2017년 10월 23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


방송이 너무 그리웠다며 우시던 첫 방송부터

그동안 감사했다며 우시는 오늘 방송까지

저도 앵디 님의 소탈하고 따뜻한 모습을 보며

정말 행복했고 따뜻했습니다.  


무엇보다 청취자들이 앵디 님을 통해 행복해하는 보며

PD로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하루 2만 원이라는 돈을 받고 진행을 하시면서도

돈이 없어 생수를 사지 못하는 저희에게

밥값과 생수 값을 이체해 주시던 앵디 님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입니다.


함께하는 동안 따뜻한 어른이자, 선배이자, MC가 되어주셨던

앵디 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모쪼록 건강하시고, 행복한 일만 가득하시길 진심으로 기원드립니다.

꼬르륵 올림



방송을 마치고, 직원들과의 인사자리에서 진행자는 나 혼자 도망가는 것 같아서 미안하다며 또 목이 메었다.


그리고 송별회, 혹시 직원들이 언론에 호소하는 자리가 있으면 얼굴이 필요할 테니 나한테도 연락을 달라고 하셨다. 내가 기꺼이 얼굴을 찍혀 주겠다고.


그렇게 지난 한 주, 나의 30대가 담긴 프로그램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다시 시작된 월요일, 이제는 시간에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프로그램의 빈자리가 느껴지면서 나는 깨달았다.


'아, 나의 인생의 한 페이지가 넘어갔구나...' 


아직 스튜디오를 뛰어다니며 원고를 수정하고, 전화 연결을 하고, 속보를 전달하던 때가 눈에 아른거린다. 돌아보니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동료들도 애정을 쏟은 프로그램을 어쩔 수 없이 닫으며 마음 한편에 나처럼 빈 방을 갖게 됐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은 계속 느는데 해도 해도 적응이 되진 않는다.


[단독]6년 만에 TBS 떠나는 최일구, 눈물로 맞은 ‘인생 3막’ - 스포츠경향 | 뉴스배달부 (khan.co.kr)


[TBS최일구의 허리케인라디오] 마지막 방송 ~ (2024년 3월 15일) (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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