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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pr 12. 2024

우리 뭐라도 해봅시다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패잔병처럼 무기력이 학습되어가던 어느 날, 어느 요일. PD 협회 소속 제작 PD들이 또 회의할 거라는 공지가 떴다. 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어두웠다. ‘사실상 폐국이 다가온 시점에서 이렇게 계속 아무렇지 않게 방송을 만들고 있어도 되는 건가?’, ‘이제 정말 BGM 방송으로 모두 전환해야 하는 그것 아닌가?’, ‘아니다. 그러기에는 시점이 너무 늦었다.’, ‘지금 본부장은 그런 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등의 의견 등이 오갔다.      


그런데 회의 주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전 대표가 마지막으로 임명한 새 라디오제작본부장이었다. 회사의 오랜 선배님이기도 하지만 의사소통방식이 상명하달식이라 어려운 부분도 있어 보였다. 사실상 그 자리는 라디오제작본부장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고, 그 불만을 어떤 식으로 새 라디오제작본부장에게 전달할지 논의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나는 더는 라디오제작본부 소속 라디오 PD가 아니었다. 나는 전 대표가 나가기 전 위기를 헤쳐나가 보고자 신설한 ‘마케팅솔루션 팀’에 배정받아 근무한 지 한 달째가 되고 있었다. 제작이 아닌 영업의 관점에서 바라본 회사 상황은 더 암담했다. 그런데 라디오 선후배들의 회의는 이제 제3자가 된 내가 보기에 지나치게 지엽적이고, 평화로웠다.      


눈앞엔 물이 밀려들어 엄지발가락에 물이 닿고 있는데 모래성 쌓을 때 해가 너무 뜨거우니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회사가 없어지면 방송도, 싸울 제작본부장도, 편성 회의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 회의내용이 너무 이상했다. 결국, 어렵게 입을 뗐다.      


“저는 사실 이 자리가 5월 31일부로 예산이 없어지면 라디오제작 PD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를 논의하는 자리인 줄 알고 왔습니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 회사 사람들 보고 참 순하다고 합니다. 자기 생계가 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는데 어떻게 그렇게 가만히 있느냐고…. 외부 사람도 그렇게 보는데 지금 이 상황에서 이런 논의를 한다는 게…. 제가 보기엔 너무 평화로세요…. 자극적인 방송을 한 부분에 대해서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폐국까지 되는 건 저는 부당하다는 생각이 있는데 여러분은 그런 생각이 없으신 건가요?”     


나의 급발진에 회의장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그러자 그간 언론노조에서 실무를 맡아왔던 후배 PD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저도 사실 이 말씀드릴까 말까 했는데...여러분 정신 차리세요. 저 여기서 제일 직급 낮고요. 여기 있는 사람 중에 제일 월급 적게 받아요. 그런데 제가 여러분한테 회사 상황을 설명하고 있어요. 여러분 지금 이러고 있으실 때가 아니에요. 정말 정신 차리세요. 아까부터 계속 이 말씀 드릴까 말까 했는데 이제 진짜 얼마 남지 않았고, 앞으로 못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말씀드려요”

      

후배 PD의 눈이 빨갰다. 정말 오래 참다 참다 한 말인 듯했다. 사석에서 그 친구는 지금 제작에만 몰두할 때는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었다. 지난 한 달, 타부서를 경험해보니 그 친구가 제작 PD들을 보며 많이 답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작한다는 이유로 시위 현장 한번 나가지 않은 PD들도 많았다. 울컥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열댓 명의 PD들, 특히 선배들이 숙연해졌다.      

적막을 깨고, 제작 팀장을 맡은 선배님이 입을 뗐다.      


"......선배로서 부끄럽고 미안하다"     


.....이런 솔직한 성토, 감정 충돌이 조금 더 일찍 이뤄져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 자리에서 미안함과 부끄러움, 아쉬움을 함께 느끼고 있는 선후배들이 참 짠했다.      


그 뒤로 여러 이야기가 오갔지만, 부차적인 것들이었다. 그렇게 착잡한 회의를 마치고 난 다음 날 아침, 회사 앞에서 우연히 그 후배를 마주쳤다. 그 후배가 의욕적인 얼굴로 내게 다가와 말했다.      


“어제 그 회의 후로 라디오 PD들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지금 총선 전까지 뭐라 해보자는 모임을 만들고 있어요”      


그러면서 어제 내가 그렇게 말해 준 덕분에 자기도 할 말 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그 친구의 말대로 오후가 되자 한 선배 PD가 나를 불렀다.      


총선 전까지 뭐라도 해보자고. 같이 하겠냐고.


끝날 때 끝나더라도 아쉬움을 덜고 싶었다. 사실 육아휴직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결국 뭐를 해보든 함께 해보기로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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