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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꼬르륵 Apr 16. 2024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하다

두 달 뒤, 회사가 문을 닫습니다.

존재만으로 위로가 되는 사람이 있다. 내가 아이 둘을 키우면서 회사를 다니다 보니 아이를 키우면서 직장 생활도 잘 해내는 선배들이 내겐 그랬다. 이 힘든 걸 어떻게 하나 싶다가도 문득 사무실 그 선배도 이런 생활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못 할 건 없겠다. 나도 해볼 만하겠다 싶었다.      


아이에게 모유수유를 하는 기간 중에 출근해서 일을 하는데 갑자기 모유가 나와 겉옷을 서둘러 갈아입은 이야기, 회사 휴게실에서 모유를 짜놓고, 집에 가서 먹인 이야기, 첫 돌잔치를 하고, 행사치레로 남편과 다툰 후 눈이 부운 채 출근한 이야기, 예전처럼 잘 집중하지 못하는 스스로에 실망한 이야기 등등. 선배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위로가 됐다.      


그런데 회사의 어려움이 길어질수록 육아휴직, 병가, 희망퇴직으로 의지하던 선배와 동료들이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지금 이 상황을 조금 더 버텨주고, 이끌어주었으면 좋겠는데 또 떠나는구나’ 나도 모르게 서운함을 느끼고, 판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내 상태가 여실히 드러난 건 내게 여자 선배로서 가장 가까운 선배의 연락을 받았을 때다.      

어느 목요일 저녁 11시였다. 오랜만에 육아휴직을 하고 있던 선배로부터 톡이 왔다.      


“꼬르륵 아, 애들은 자니?”

아이 둘을 키우는 선배는 일부러 아이들이 자는 시간을 선택했을 것이다. 나는 답했다.

“네~애들은 자요”

평소 같았으면, “선배님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내세요?”라고 답을 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선배의 부재에 대해 옹졸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자 선배가 말을 이었다. 잠시 전화통화가 되느냐고. 그러나 곧바로 밤이 너무 늦어서 미안하다며 퇴사를 하게 됐다.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늦었지만 연락했다. 지금 너무 늦었으니 내일 잠시 통화하자라는 내용이었다. 연이은 톡을 보며 옹졸했던 나는 고심 끝에 긴 장문의 톡을 보냈다.       



선배님~지난번 00과 00을 환송하는 회식자리에서 선배님께서 곧 복직을 하실 거라는 말을 듣고 너무 기뻤습니다... 사실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힘들어져서 누구라도 함께 짐을 져주셨으면 하고 선배님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00 선배님도 휴직하시고, 00 선배님 아프시고, 00 선배님도 희망퇴직하시고, 00 선배를 비롯해서 지금도 매일 누군가 계속해서 병가, 휴직, 퇴사를 하고 계세요.     

떠나시는 분들의 상황과 고민, 어려움은 말씀하지 않으셔도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습니다

. 그런데 아직 남아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회사의 회생할 가능성, 이 결과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떠나는 분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남은 사람들 마음도 어렵습니다...     

사실 이 상황에서는 누구나 다 어렵죠. 그런데 저는 그 일들을 계속 목격하고 있기 때문에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연락을 주셔서 감사해요. 선배님. 그런데 선배님의 퇴사결정은 제가 정한 시기까지 회사를 위해 다 해보고, 저도 뭔가 정리가 됐을 때 듣는 게 제 마음을 지키는 데 좋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솔직히 이제는 이렇게 떠나는 분들의 소식을 듣는 게 많이 힘들기도 하고요.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선배님. 개인적으로 저는 선배님과 함께 더 제작하지 못해서 아쉽지만 선배님 결정을 응원드립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서 덜 아플 때 꼭 웃으며 통화할 수 있는 날을 바라봅니다.     


내 딴에는 최선을 다해 감정을 정리해 적은 글이었으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전혀 없는 글이었다. 글을 확인한 선배에게 새벽녘에 답이 왔다.     


‘힘든 시기에 곁에 있어주지 못한 것도 미안하고, 이런 말을 전하게 된 것도 미안하다’는... 돌이켜보면 선배는 선배 나름의 회사 생활의 고충이 있었다. 그리고 내가 알지 못하는 여러 사정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나 남이 모르는 속사정이 있는 거니까. 그런데 그런 선배의 자기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내가 섣불리 판단하고, 정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지금 이 회사의 상황은 누가 어떤 선택을 하든 뭐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선배에게 미안했다.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을 텐데 무거운 마음을 들게 해서. 그 후 결국 미안한 마음에 한결 가볍게 메시지를 드렸지만 애초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아직도 선배에게 미안하다.      


이제 아무도 원망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직원들끼리 미안해하는 이 상황 원인이 무엇인지 정말 잘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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