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일기
"나를 왜 돌봐야 하나요?"
얼마전 정신과 진료 중에 담당 선생님께 한 질문이다. 이건 자조적인 물음이 아니었다. 정말 모르겠어서, 나를 돌보는 일의 필요성을 납득하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었다. 건강한 보통 사람들은 자신과 주변을 돌보는 일을 수행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나는 나를 돌보는 일이 어렵고 버겁다. 그래도 문제 없이 살았다. 나를 돌보지 않아도 남에게 피해가 되는 건 아니니까. 나한테 피해를 끼치는 건 괜찮았다. 내 손해니까. 그건 내가 감당하면 되니까.
그래서 스스로를 방치하는 날들이 많았다. 일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밥을 하는 일도, 먹는 일도, 날 씻기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는 일이 되지 않았다. 많이 자고, 별로 먹지 않고, 술을 자주 마셨다. 밤새 넷플릭스를 보거나 책을 읽었다. 스스로를 완전히 놔버리는 동시에 나를 미친듯이 소진시켰다. 하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괜찮았다. 남한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아니니까. 그저 내 손해니까. 그래서 친구들이 걱정할 때도 크게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그래와서 문제라고 인식조차 못했다.
나는 만성우울증과 성인 ADHD를 겪고 있다.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약을 복용하기 시작한 건 4년 전인 2016년. 하지만 제대로 치료를 받았다기 어려울 정도로 내원 횟수가 1년에 4번에 그쳤고, 꾸준히 6개월은 먹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약도 제대로 복용하지 않았다. 4년간 그래왔고, 그러지 않으려 했지만 매번 실패해왔다. 그래서 진료실을 들어갈 때마다 나는 죄인이 되어 매번 "죄송해요..이번에는 약을 다 먹으려 했는데...못 먹었어요. 죄송해요..오려고 했는데 이제야 왔네요"와 같은 말을 4년째 반복해왔다.
이렇게 엉망이게나마 진료를 꾸준히(?) 이어온 나를 담당 선생님은 항상 독려해주셨다. 이렇게 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괜찮다고. 그래서 이번에도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독려 대신 약을 꾸준히 먹지 않는 이유와 어떨 때 약을 먹는지에 대한 질문이 돌아왔다. 나는 대개 나의 증상이 업무에 지장을 준다고 느낄 때만 선택적으로 먹는다고, 그리고 술을 자주 먹기 때문에 약을 안 먹을 때가 많다고 답했고, 그러자 4년 만에 처음으로 혼나는 기분마저 들 정도로 단호한 말이 돌아왔다. 그건 문제가 있는 거라고. 자신을 방기하지 말라고. 다른 사람이 소중한만큼 자신도 소중하고, 스스로를 돌봐야 한다고 말이다.
나는 소중하다. 날 잘 돌봐야 한다. 살면서 숱하게 들어온 말이었다. 정말 많이 들어왔지만 그게 내 얘기 같지는 않았던 말. 하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날 흔들었다. 4년간 진료를 받으면서 처음으로 느낀 단호함 때문이었을까? 그냥 네네 하며 넘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왜 돌봐야 하나요?"라고 물은 것이었다. 담당 선생님은 내게 태어났으니 날 돌보는 게 당연한 책무이며, 인권의 차원에서라도 돌봐야 한다고, 인권에 관심이 많으면서 자신의 인권은 존중해주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성이 없는거라고 말씀하셨다. 더도 덜도 말고 남한테 하는 만큼만 자기한테 하라고. 또 어렸을 때 돌봄이 없었거나 적은 경우에 돌봄이 왜 좋은지 몰라서 자신을 돌보는 일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경우 날 돌보는 일, 주변을 돌보는 일이 좋다는 걸 경험해보는 게 필요하다고도 하셨다. 마치 운동이나 주식처럼.
지금도 이 얘기가 왜 이렇게나 훅 들어왔는지 정확히 설명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동안 들어왔던 어떤 이유들보다 내게 굉장히 신선했고, 와닿았다는 사실이다. 그냥 나를 돌보는 건 좋은 거니까 돌봐야 한다는 차원이 아닌 인권이나 진정성의 차원에서 나를 돌봐야 한다니. 생각해보면 인권이나 진정성 등은 항상 '타인'에게 대입하는 개념이었지 나에게 대입해본 적이 없었다. 인권을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정작 나의 인권은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 사실에 좀 놀랐던 것 같다. 그리고 나한테 좀 미안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 거의 1년 만에 이사가는 수준으로 집을 싹 다 청소하고, 홈트존을 만들고, 손님이 오지도 않는데 장을 보고, 요리를 하고, 끼니를 챙겼다. 많이 자고, 별로 먹지 않고, 술을 자주 마시는 일도 줄였다. 아무도 내게 시키지 않아도, 뭐라고 하지 않아도, 나를 생각하고 챙겨보려고 하니 이 일들이 가능해졌다. 아직은 나를 돌보는 일이 정확히 어떤 건지, 나를 돌보는 일에는 어떤 일들이 있는지 다는 모르겠다.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서른이 되어 인생 최초로 나를 돌보는 일을 시작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