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2020 을 보고
이 글은 영화의 내용과는 관련이 없음을 미리 밝혀둔다.
프랑스 미학 철학자인 폴비빌리오 에 따르면 극의 관성이란 극한에 다다른 속도 속에서 이뤄지는 정지, 혹은 지리적 공간의 현존이 "임계점"에 들어선 상황 (지리적 공간의 소멸)을 말한다.
비빌리오가 즐겨쓰는 비유를 빌려 말하면 떠나기도 전에 도착해 있는 여행객, 고속열차를 타고 여행하기에 전혀 신체를 움직일 필요가 없는 여행객, 한 군데 앉아서도 전세계 주식시장을 넘나드는 투자자의 상황인 것이다.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말이다.
그는 거리와 속도로 현대예술에 관한 현상학을 말한다. 급속도로 오가는 실시간 인터넷혁명과 운송수단의 혁명으로 우리는 존재하기도 전에 존재하고 존재하지않아도 존재하는 것과 같은, 지각작용의 인식을 뒤바꿔버렸다.
이는 곧, 보고 듣고 느끼는 시지각 예술에서의 중요한 물음인 "재현"의 문제에 직면한다. 탈영토, 탈지역, 탈물질화한 원격통신망의 세계!.
그 속에서 예술은 기술문명의 가속화와 질주가 일상을 완전히 지배해버린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 너머를 보게된다.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는 기존의 예술을 "망막예술"이라고 비판했던 뒤샹을 넘어, 기계와 인간의 쌍방향으로 가상현실을 제조하는 "초망막예술"의 지경에 이른다. 그리고 궁극엔 소멸한다. 그러면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존재라는 것은 무엇일까
비빌리오의 "극의 관성"을 내 나름대로 해석해 보자. 극의 관성은 기계예술에 잠식당한 무감각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동물적 신체를 단지 없어지게 만드는 것을 넘어 마비시켜버린다고 할 수 있다.
즉 현대인들은 정신없이 바쁘게 하루를 숨가쁘게 살아낸다고 해도 결국 무운동성의 제로섬게임에 갇혀 현존을 무존재로, 존재낭비하고 있다는 말이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차라리 하루를 그냥 무의미하게 , 하릴없이, 부질없이 사는것도 나쁘지 않다. 전부 아니면 무이기에
sns로 관계 낭비하기, 영화보기로 이미지 낭비하기, 책읽기로 종이낭비하기, 글쓰기로 언어낭비하며 시공간을 초월해 존재낭비하는 삶. 어차피 비빌리오의 이론대로라면 우리는 시지각적 폭력에 노출되어 수동적으로 마비되어가는 존재에 다름 아니고 결국 소멸되어 갈테니까. 그런데 과연 그렇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