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진행 작가 Aug 14. 2021

좌절의 아픔

좌절의 긍정적 면&부정적면

어떤 일이나 도전을 하는 중 무너진 적이 있는가? 실패로 돌아간 적이 있는가? 살아가면서 탄탄대로를 달린 사람은 없다. 한번쯤 아니면 그 이상 좌절을 경험한다. 좌절을 통해 마음이 무너지고 아픔을 체험한다. 성공만 있는 삶은 아니다. 오르막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리막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자주 넘어졌다. 걷기연습을 하며 수없이 넘어졌다. 넘어지며 좌절을 경험했다. 무릎이 까이면서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넘어지면 드는 생각은 매번 같았다.    


‘나는 왜 걷지 못할까?’

‘나는 왜 걷다가 넘어질까?’    


‘왜’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가득해졌다. 매번 이런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걷고 또 걸었다. 걷기연습한 첫날에는 한발도 내딛기가 마치 꽁꽁 언 강을 건너는 것 같았다. 앞에서 말을 하며 용기를 주는 아버지의 말도 들리지 않았다.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가득했다. 하지만 땅과 혼연일체가 되어버려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앞에서 아버지는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고 답답했다. 첫날은 한발도 내딛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주일에 서너번 아버지와 걷기연슴을 했다. 그리하여  한달 뒤에 한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넘어지며 좌절의 맛을 경험했다.     


대학교 4학년 당시 사법시험을 보기 위해 학업과 더불어 학원에 다녔다. 신림동 고시촌에 있는 학원으로 다녔다. 사법시험 합격해서 법조계에서 일을 하고 싶었다. 학원을 다니며 매달 모의고사로 평가를 해 보았다. 모의고사를 보면 점수가 낮게 나왔다.     


‘나는 이 길이 아닌가 보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좀 더 공부하면 될 거라는 마음으로 공부에 매진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스터디를 만들어 공부했다. 같이 공부한 사람들은 점수가 잘 나왔다. 그들은 비장애인이기에 점수가 잘 나온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함께 공부하며 토론하는 데에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어느 날 함께 공부하는 형이 이런 말을 했다.    

“진행아! 사법시험 말고 다른 시험 보는 건 어때? 매번 모의고사 점수가 그리 나오면 학원비만 나가지 않겠니?”    

그날 저녁,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사법시험 1차 원서접수 날짜가 다가오고 있었다. 원서접수 날짜가 다가오면서 함께 공부 중인 형이 이런 말을 하니 고민이 되었다. 기도를 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졸을까요? 알려 주세요!”    


기도하며 고민 끝에 결정했다.    


‘그래, 다른 길을 찾아보자. 대학은 일단 졸업하고 생각해 보자!’    


이런 생각 중, 고2때 담임 선생님으로 연락이 왔다. 셔울 강서구에 위치한 ‘기쁜우리복지관’에사 공무원반을 개설한다며 공무원 시험에 도전해 보라는 것이었다. 바로 복지관에 연락해서 신청하고 수업을 들었다. 모의고사를 보면 점수는 잘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시험을 보면 매번 떨어졌다. 그렇게 3년간 공무원 시험에 도전을 했다. 하지만 매년 안 되었다. 그로 몇 년 뒤에 복지관에서 근무한 직원을 다른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분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는 왜 떨어졌는지에 대한 의문을 풀어주었다. 답안지 작성이 문제였던 것이다. 답안지를 한칸씩 밀려 쓰는 문제가 아닌 마킹 문제였디. 컴퓨터 싸인펜으로 마킹을 하는데 바깥으로 삐져 나가 판독이 안 되었던 것이다. 복지관에서 당시 행정자치부에 건의를 했다고 한다. 애가 있는 응시생에게 수학능력시험처럼 시간안배를 요청드리는 공문을 보냈다고 한다. 행자부로부터 온 답신은 제안해줘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동안 전혀 고민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 공문을 보내주어 고민을 시작했다는 것과 당장 시행하기에는 어렵지만 그 시간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내용도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들으니 희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계속 불합격이 되어서 응시를 포기했지만 장애인 응시생들에게 희망의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도한다.    


공무원 시험을 보면 매번 떨어져 직장을 구하기로 한다. 방송통신대학교라서 저녁때 TV 수업이나 라디오 수업이 있다. 교회 청년부에서 봉사활동을 한 장애인기관이 있었다 그곳 원장님 소개로 장애인 신문사에서 일하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그로 몇 달 뒤 그분이 영등포에 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일하는 회사를 연결해 주어서 대학입학을 한 해인 1995년 4월부터 2005년 6월까지 일했다. 낮에 학교에 가서 도서관에서 공부를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낮에 다닐 직장을 구한 것은 학비라도 스스로 마련해 보고 싶어 구한 것이다. 하지만 학비는 부모님이 마련하여 주었다. 회사에서 받은 것은 적어서 용돈으로 사용하였다. 2005년 6월까지 일하고 7월부터 경기도 분당 전자부품연구원으로 취업이 되어 출근했다. 여기를 2008년 계약이 종료되어 퇴사하고 다른 곳을 찾기 위해 이력서를 제출했다. 연구원을 퇴사하고 한동안 취업이 안 되었다. 한동안 좌절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1년간 수도 없이 지원서를 냈다. 함께 하자는 회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서류심사에서 면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다가 간혹 취업이 되는 때도 있었다. 비정규직 인생이었다. 한 회사에 짧으면 1년, 길면 2~3년이었다. 장기근속하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퇴사를 하면 바로바로 취업이 되기를 바라면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취업이 안 되면 ‘왜 취업이 안 되지?’, ‘무엇이 문제지?하며 좌절을 하였다. 좌절한 마음은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띄엄띄엄 취업이 되어 일을 한 것은 다행이다. 감사하다.    


많은 좌절 속에 살아왔다. 좌절은 부정적인 작용만 하지는 않었다. 좌절은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무너지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희망의 메시지도 주었다. 좌절은 나를 돌아보는 계기를 주었다. 현 상태가 어떤지, 무엇이 부족하는지, 그래서 앞으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대한 대비를 하게 해 주었다. 또한 좌절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도 알려주었다. 넘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을 걷기연습을 하며 알게 되었다. 넘어지며 배우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좌절을 경험하며 배웠다. 넘어져 가는 과정속에서 장애를 극복하게 해 주었다. 실패하며 겪는 좌절 속에서 절대로 표기하지 말라는 내면의 목소리가 들린다. 좌절의 아픔 속에 산다고 완전히 주저하지 않는다. 그 좌절 속에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흐뭇한 기쁨은 없지 않겠는가.     



* 위의 글은 저의 차기 작품 처음 부분입니다. 가끔 적고 있는 글을 올릴 겁니다. 미리 맛보기용으로 부분적으로 올리렵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의 신간 '나는 치열하게 살아갑니다'도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808172


작가의 이전글 치열하게 살아냅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