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 Jan 03. 2024

<제주방랑>을 읽고

곧 출간될 내 책이란 콩밭에 마음을 빼앗긴 요즘이라서 다른 책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몇 주를 보냈다. 집중을 못한 탓인지, 집어든 책마다 실패한 탓인지 눈으론 글을 보는데 생각은 다른 곳을 둥둥 떠다녀서 읽었다고 기록하기도 뭣한 시간만 이어졌다. 말로만 듣던 ‘책태기’가 이런 것인가... 큰 즐거움 하나를 잃는 건 아닌가... 하는 뭉근한 걱정을 떨쳐버리려고 좋아하는 작가님의 책을 과감하게 집어 들었다.     

  

<권수정 산문집>도 워낙 좋았던 데다 오랜 뜸 들임 뒤에 선보인 에세이라서 물론 기대했지만 이 정도로 재미나게 읽을 줄은 몰랐다. 여행, 제주, 책과 책방처럼 좋아하는 카테고리의 이야기가 잔뜩인 데다 그 안에서 길어 올린 단상과 깨달음들도 뻔하지 않아서 정체불명의 책태기란 수렁에서 나를 단박에 건져주고도 남았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장소와 제주의 풍광을 담은 사진은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붕붕 떠다니던 내 마음이 고요해지는 순간이 찾아왔다.      

책 초반엔 재미있게 쓰려고 작정한 작가님의 의도가 엿보여서 자주 웃었는데 어쩐 일인지 뒤로 갈수록 어떤 감정을 숨기기 위해 짐짓 명랑, 쾌활하게 웃는 어린 소녀가 떠올랐다. 왜 이런 생각이 자꾸 들까? 큭큭큭 웃다가도 또 밀려오는 그 생각에 잠시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러다 그 감정의 이유를 희미하게 언급하는 글 앞에서 ‘역시 그랬구나’... 괜히 내 마음이 쓰렸다. 삶에 적당히 끼어든 구름이 어찌 사람을 가리겠는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은 그 사연이 부디 수월하게 흘러가주길 바라는 마음이 된다.      


그렇게 작가님의 입도와 출도의 여정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함께 저지리예술인마을에 들렀다가 해장국 한 그릇을 비우고, 의자가 편한 카페에서 서로의 글을 쓴 뒤 주섬주섬 천가방을 챙겨 일어나 저녁 메뉴를 의논할 것만 같은 친근한 느낌이 몰려온다. 좋은 에세이의 조건은 참으로 다양하겠지만 내가 꼽는 첫째 조건은 작가가 궁금해지고 결국 좋아하게 되는 거라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또 한 번 성공한 것 같다. 그래서 해장국집 사장이 되고 싶은 권수정이든, 야쿠르트 아줌마가 되고 싶은 권수정이든, 서핑 수트를 두 벌 겹쳐 입고 청량한 척 포즈를 취하는 권수정이든 일단 그냥 써보기로 작정한 작가님을 애정하고 응원하게 된다. 아나하타 수정!!                 


하지만 섣불리 동경하지는 않기로 했다. 제주에 오기 전에 했던 다짐 때문이다. 거기서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그들의 삶을 이상화하지 말자는, 겪어보지 않은 삶을 지레짐작하지 말자는 다짐. 어떤 삶도 좋기만 할 수는 없다. 우리는 서로의 삶을 깊이 알지 못한 채로 끊임없이 서로를 부러워한다. 맞바꾸자면 선뜻 그러지도 못할 거면서. P70      


#제주방랑 #권수정 #심다     

작가의 이전글 <세이노의 가르침>을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