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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K May 24. 2021

내가 있어야 할 곳. 내게 어울리는 곳

   문득 어두운 도로, 어둡고 적막한 차 속에 홀로 앉아 지금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곳에 있는가 생각해본다. 메뚜기는 들판에, 고래는 바다에 살아야 하듯이 내가 살아야 할 곳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차저차 오게 된 이곳. 함께 할 사람을 선택한 것은 나이지만 장소를 선택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한 장소에서 아주 오랫동안, 짧게는 1년 길게는 평생을 살아간다. 나도 어느덧 이 곳에 온 지 결혼 생활과 함께 10년이 되었다. 그 전에는 작던 크던 늘 탁 트인 하늘이 보이는 곳에서 살았다.  하지만 이곳의 하늘은 매우 비싸다. 처음 집에 들어와 창 너머로 하늘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가슴 한쪽이 턱 막히는 듯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삶은 그런 것 따위에 답답해하기에는 너무나 바쁘고, 찬란하다. 그런 감정은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2년 전, 살던 예전 집 골목에 우락부락한 전봇대가 있었다. 여러 것들이 얼마나 어지러이 엉켜있던지 종종 까치가 나무인 줄 알고 그곳에 집을 짓곤 했다. 미끄러운 쇠붙이는 까치가 물어온 나뭇가지들을 붙들어주지 못했다. 가지들은 전봇대 밑으로 수북이 쌓였다. 그곳에 누군가 둥지를 트려 한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까치 두 마리는 쉴 새 없이 나뭇가지를 날랐다. 알을 낳을 예정인지, 이미 산달이 다 되었는지 열심히 왕복하는 까치들을, 새라고는 일자무식인 내가 보고 있자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결국 까치들이 둥지를 완성하는 일은 없었다. 자리를 잘못 잡은 것이다.


   나의 자리는 어떠한지 생각해본다. 종종 내가 지독하게도 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은 대학 합격통보를 받았을 때, 서울로 올라가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왜인지 혼자서 부르르 몸서리쳤던,  성인과 미성년 사이의 불명확한 그때. 그때부터 종종 깜빡깜빡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한다.


   그와 함께 생각한다. 나는 참 작은 사람이구나. 마음도 머리도 작아 다른 이를 다른 곳을 품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사람이구나 하고. 새로 산 빳빳한 구두에 플라스틱을 넣어 억지로 늘이는 것처럼, 지난 십여 년간 나 역시 서울에 올라온 뒤로 고집쟁이인 억센 나를 늘이고 부드럽게 하려 부단히 노력했다. 뒤 돌이 켜보면 그래서 얻은 것도 참 많고 고마운 것도 많았던 시간들이다. 나는 바뀌지 않은 듯, 참 많이 바뀌었다.


   중학생 시절에도 너무나 의기소침한 내가 싫어 나름 특단의 조치를 취한 적이 있었다. 여러 가지 노력을 하며 나를 더 나은 방향(선생님과 부모님, 친구들 그리고 내가 원하는)으로 바꿔나가려 했다. 처음에 새로운 나로 이야기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심화과정으로 들어가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들이 온다. 마치 가장 아름다운 새를 뽑는 대회에 나온 까마귀처럼, 순식간에 아름다운 깃털들이 우수수 빠져나간다. 애초에 내 것이 아니었기에 갈 때도 미련 없이 빠져나간다. 그러고 나면 나는 길을 잃는다. 내가 싫어한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도 되는지, 깃털을 다시 꽂아야 하는지, 더 튼튼히 고정해야 하는지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내 몫이다. 나는 두 번째 안을 택했다.


   지금도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 종종 내 것인 양 화려한 깃털들 사이에 나의 검은 깃털이 발견된다. 까마귀 그 자체로 살아간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에게 딱 맞는 둥지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현실에게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례한 질문일까?


   어제 서울로 올라오는 빗길, 차 안에서 운전대를 잡은 그이가 3년 뒤, 먼 곳으로 긴 여행을 떠나면 어떻겠냐고 툭 말머리를 던졌을 때, 우리 둘은 오랜만에 어린애들처럼 긴 대화를 나눴다. 그럴 리가 없어에서 그럴 수도 있지로 바뀔 때의 그 힘은 얼마나 대단한지! 그곳이 내가 있어야 할 바로 그곳이 아니더라도 계속 찾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었는지, 그이는 나의 잔뜩 설렌 목소리에서 읽어냈을 것이다. 그 희망이 이루어졌을 때는, 우리 예전엔 전봇대에다 집을 지으려 애쓴 적도 있었지, 당신 그때 백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 까마귀였어, 하고 둘이 마주 보고 웃겠지. 지금은 그런 보이지 않는 미래에도 함께할 이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내 눈 앞의, 가까운 곳에 함께하고 있는 희망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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