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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보미 쬬이마마 Aug 28. 2023

씁쓸한 위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빚어진 엄마의 고된 노동을 추앙하며...

열등감처럼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게 없는데, 그건 그 사람이 처음에 우월감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으스대는 쾌감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안 알아주는 입장을 참아내지 못하는 겁니다.

<행복하게 사는 법> _ 박완서 외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더위가 그친다는 처서의 새벽에는 창문을 열어두고는 잘 수 없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것은 비에 젖은 흙냄새로, 봄이 여름으로 넘어가는 것은 짙은 녹음의 빛깔로 구분을 했다. 그날 새벽에 나를 깨운 것은 바람이었다. 옷 밖으로 나온 살갗의 가는 털들을 곤두서게 하고 뒷목을 서늘하게 만드는 바람이었다. 청량한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반가운 바람이 그날 새벽에 도착했음을 느꼈다.


   이렇게 찬바람이 부는 날에는 아침에 뜨끈한 국물을 먹어야 하루의 시작이 든든하다. 메뉴를 고민하다가 나는 미리 사둔 청국장을 꺼냈다. 특별한 재료 없이 송송 썰은 묵은지와 큼지막한 두부를 넣어 몽글하게 끓여내야지 생각했다. 소화가 잘돼 부담 없는 음식, 추운 날에 호호 불어먹으면 더욱 맛있는 청국장이 제격이었다.



   나는 아이를 임신하고 입덧이 참 심했다. 임신 5개월까지 몸무게가 늘지 않았다. 가장 심했던 일주일은 얇게 썰은 현미 가래떡 다섯 조각으로 하루를 버티고,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병원에서 영양제를 맞으며 버텼다. 그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건 청국장 덕분이었다. 엄마의 묵은지와 청국장을 한데 끓여 누룽지와 식탁에 올려놓으면 이것만은 겨우 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인지 우리 집 여섯 살 아이는 처음 청국장을 만났을 때부터 오늘까지 청국장을 잘 먹는다. 청국장을 끓여놓으면 김에 밥을 싸 먹으며 숟가락으로는 국을 떠먹거나, 아예 국에 밥을 말아 한 그릇 뚝딱 비워냈다.


   입덧으로 어제 먹은 음식은 물론이요, 방금 식도로 넘긴 것까지 모두 게워냈던 내가 '청국장'을 생각해 낸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을 것이다. 이런 것을 소울푸드라고 해야 할까.


   달그락 소리에 주말 아침 늦잠을 자고 일어나 거실문을 열어보면 엄마는 메주를 빚고 계셨다. 매년 간장, 된장, 고추장을 담그셨고, 콩이 익은 계절에는 시골에서 짚을 가지고 오셔서 직접 청국장을 띄우셨다. 서울 하늘 아래, 일반 가정집 주택 안방의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서는 청국장이 띄워지고 있었다. 엄마가 시집올 때 해온 목화솜이불이 든든한 온기를 더해주어 띄운 지 며칠 되지 않아도 발효된 청국장은 실처럼 주욱 늘어졌다.


   냄새난다고 타박하고 짜증을 내도 엄마는 멈추지 않았다. 그런 엄마의 청국장 사랑을 나는 서른이 넘어서야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먹기 시작했다. 시간이 흘러도 단념하지 않았던 고집스러운 노력은 뱃속의 아이에게는 생명수가 되었을 것이다.



   엄마의 이런 능력은 내게 늘 자랑이었다. 학교 소풍 때 김밥은 그 모양이 늘 기발했다. 요즘 티브이에서 맛집으로 유명해진 김밥들을 나는 미리 집에서 경험하지 않았을까 싶다. 물방울 모양 김밥, 소고기를 넣은 김밥, 계란말이 김밥 등 항상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소풍날 아침에는 옆구리가 터진 꽁지만을 먹어도, 친구들이 부러워할 김밥을 내보일 생각에 설레었다. 지금도 소풍날 어디에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아침에 엄마가 싸주시던 김밥과 그 분위기는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소화가 잘 되라고 지은 약간 질은 밥, 돌돌 말린 김밥에 시골에서 직접 짠 참기름을 바르고 통깨를 뿌렸던 그 고소한 냄새들 말이다.


   엄마의 점심 도시락도 유별났다. 단 한 번도 슈퍼에서 파는 가공식품을 싸주신 적이 없다. 흔해빠진 3분 카레나 돈가스도 집에서 직접 만드셨다. 사실 카레와 돈가스를 이토록 간편하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오랜 뒤에야 알게 되었으니까. 한 번은 시골에서 받아온 허파를 볶거나, 전처럼 부쳐서 도시락 반찬으로 싸주신 적도 있었다. 이쯤 되면 나와 함께 도시락을 먹었던 친구들도 처음 보거나 먹어본 반찬들이 많았을 것이다. 맛은 물론이거니와 신박하기도 했던 반찬 덕분에 깔깔 웃고 떠들며 즐거웠던 점심시간이었다.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여전히 내 입을 통해 즐겁게 회자되고 있다.


   

   엄마의 청국장은 이제 우리 집 냉장고에는 없다. 오늘 아침 밥상에 오른 청국장은 마트에서 샀다.  엄마네 집 냉장고에도 이젠 없다. 일회용 플라스틱에 담긴 청국장을 끓이며, 콩을 삶고 가장 따뜻한 아랫목에서 띄워져 실이 죽죽 늘어나는 걸 보글보글 끓여주셨던 기억을 떠올려본다. 나의 가난했던 영혼까지 살찌웠던 엄마의 수고가 사무쳤다. 분명 고되었을 엄마의 노동에 미안하면서도, 그리웠다.  


   그 수고로운 과정을 거치는 엄마는 늘 내 자랑이었다. 우리 엄마가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런 사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느냐고, 나는 매일매일 먹는다고 동네방네 자랑을 했었다. 그 청국장을 맛을 몰랐으면 몰랐지 알아버진 지금은 그걸 잊을 수 없다. 살랑이는 첫가을바람이 살갗에 스칠 때마다 생각이 날 것이다. 높아지는 가을하늘을 보고, 바닥에 쌓이는 노오랗고 붉은 낙엽을 볼 적마다 생각이 날 것이다.

   

   사랑만이  고됨을 이겨낸 유일한 힘이라는  알아버린 지금, 다시 청국장을 맛볼  없어 나는 슬펐다. 장판이 까맣게 타도 아랫목에 청국장을 띄워보자고, 이제는 콩을 삶아 함께 청국장을 빻아보자고 말하고 싶어져 아팠다. 여섯  아이에게도 할머니 솜씨를 자랑하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다.


   무엇이 위안이 될까. 우리  여섯 살은  청국장을 먹고 엄마를 자랑하지는 않을 테지, 청국장도 먹을  있다는 여섯  자신을 자랑스러워할 것이다. 아이는 우월감을 모르기에 열등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테지. 그러나 나는 아이를 부러워하지않았다. 그저 맛있게 먹는 아이를 보며 씁쓸해진 위로를 목구멍으로 밀어 을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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