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읽기 어려운 책들이 있습니다. 일부 고전과 철학 책, 과학 기술 분야의 책 등은 배경 지식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대충 이해는 하더라도 맥락을 모르면 재미있게 읽기는 힘듭니다. 저도 끝까지 읽어보고 싶은데 시작만 하고 중도에 포기했던 책이 여러 권입니다. 해설서를 찾아볼까 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원전도 안 읽었는데 무슨 해설서까지 보겠냐는 생각에 잘 안 읽게 됩니다. 이런 생각을 바꾸게 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지옥편을 읽었지만 크게 감흥이 없었고 재미도 없었습니다. 이마미치 도모노부가 쓴 <단테 신곡 강의>는 제목이 말하는 바와 같이 <신곡>을 강의한 내용입니다. 단테의 신곡을 해설한 책인데 우연히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하고 뒤적거려 보았습니다. 그전에 별로 와닿았지 않았던 유명한 책을 어떻게 해설했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배경뿐 아니라 이탈리아어 원전을 인용하며 운율까지 설명하며 작품의 맛을 보여주는데 이렇게 친절할 수가 있을까요. 해설서를 이렇게 재미있게 읽은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일본 작가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문물을 상당히 체계적으로 받아들였다는 느낌이 듭니다. 일본에서 나온 특정 주제에 대한 안내서나 해설서를 보면 그 다양함과 친절함에 놀랄 정도입니다. 서양 고전이나 철학, 예술 등에 대한 책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는 초보자들을 쉽게 이해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학자들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보통은 해설한 책이 원전보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서 명쾌한 해설서를 보면 고맙지요.
이런 농담이 있습니다. 박사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자신을 포함해서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복잡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일본에는 친절한 학자도 많은 모양입니다. 일본인이 쓴 해설서는 대체로 쉽고 핵심 정리가 잘 되어 있어서 초보자가 보기에 아주 좋습니다. 제가 회사 생활을 할 때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형 컴퓨터의 관련 매뉴얼은 수천 페이지에 달합니다. 미국에서 나온 영어 매뉴얼은 문제가 생겼을 때 키워드를 가지고 찾아보기에는 좋지만 누구도 그걸 다 읽어서 공부하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보니까 누군가 자주 일어나는 문제를 중심으로 요약본을 만들어 둔 것이 있더라고요. 분량은 1/10도 안 되고 80-90%의 문제는 이걸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서 놀란 적이 있습니다. 한국인은 성향이 어떨까요? 정보를 능력이자 권력이라 여기고 자기가 아는 해결책을 기록하거나 공개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조선 시대의 정교한 기록 문화는 언제 사라졌는지 모를 일입니다. 한국에서는 반일이, 일본에서는 혐한이 대세인데 이는 정치적인 선동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서로의 좋은 점마저 부정해버리는 편협함이 지배하고 있는 사회적 풍토가 아쉽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이라는 일본의 비평가가 있습니다. 그의 책 <세계사의 구조>와 <철학의 기원>을 읽고 특이한 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두 책에서 그는 상당히 독창적인 견해를 가지고 세계 역사와 그리스 철학의 기원을 각각 논하고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이 이 작가는 문학과 역사, 철학 등 각기 다른 분야에서 심도 있는 책을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한 가지 분야도 제대로 알기가 어려운데 다방면에서 그렇게 깊은 내공을 느낄 수 있는 책을 쓰는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공부를 많이 했을까 존경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그의 책은 모두가 각 분야에서 독특한 개성을 보이며 훌륭한 참고서의 역할을 하고 있어서 누구에게나 추천하고 싶습니다.
마쓰오카 세이코는 일본에서 독서가로 또 저술가로 유명합니다. 이 분의 독서 방법 중 제가 감탄했던 것이 있습니다. 그가 ‘편집적 독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독서는 일종의 편집 활동이라는 것인데 충분히 합리적인 주장입니다. 이 분은 자신이 읽은 책들에 대해서 연표 같은 것을 만들어 기록을 합니다. 가로축은 문학, 예술, 철학, 과학 기술, 정치 등 분야별 열을 만들고 세로축에는 세부 분야를 나누어 생긴 행렬의 칸마다 연대별 독서 기록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설이면, 작가나 작품에 대한 배경부터 시작해서 소설의 인물이나 사건, 주제 등에 대해 연도부터 사회상이나 유행까지 데이터베이스 화 하는 거지요. 이런 정보가 모이면 빅 데이터라 불러도 될 만합니다. 다른 분야의 책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읽는 도중이나 다 읽고 난 후 인상적인 내용과 핵심을 행렬의 해당 칸에 적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정보의 역사>에 이런 정리 과정을 자세히 설명하는데, 이 책을 보면, 와 이거 대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마쓰오카 세이코의 방법을 우리가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겠지만 기본적인 방법론은 참고할 만합니다. 책을 읽으며 배우는 것을 자기 자신만의 방법으로 축적할 수 있다면 나중에 커다란 자산이 될 겁니다. 단지 지식의 축적뿐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력이 자라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