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비평
랑시에르는 우리가 통념적으로 정치라고 부르는 활동이 치안 활동에 불과하다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치안은 기존의 질서를 유지하고 관리하는 ‘일치’의 활동이며, 정치는 기존의 분배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새로운 분배 방식을 모색하는 ‘불일치’의 활동이다. 그리고 예술의 정치란 “기존의 정치 영역에서 의제화되지 못한 목소리들을 듣고 비명을 지르는 존재들을 기억하고 가시화함으로써 불일치를 창조하는 광범위한 활동”이다.
<생일>에서 표현되는 슬픔은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는 전복적인 슬픔이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치안이 아닌 ‘정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슬픔이 카타르시스에 도달하면 관객은 감정을 폭발적으로 분출한 뒤 안정을 찾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설명했다. 라깡은 관객을 기존의 질서에 고착시키는 카타르시스의 안정화를 비판하며, 슬픔은 오직 우리 삶의 뿌리를 흔들어 우리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게 할 때만 진실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고 이야기한다. ‘세월호’라는 거대한 슬픔은 유가족들의 삶의 뿌리를 흔들었고, 이들은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 방황하게 되었다. 우리 공동체가 과거의 반복일 뿐 이곳에 미래를 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은 기존의 삶의 자리를 떠나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생일> 역시 유사-정의와 유사-시간에 의문을 제기하며, 고요하되 끈질긴 시선으로 새로운 언어를 찾기 위한 투쟁에 동참한다. 따라서 <생일>이 슬픔을 드러내는 방식은 기존의 질서를 거부하고 불일치를 만들어내는 ‘정치’의 활동이다.
낡은 언어로 슬픔을 설명하는 것을 거부하고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투쟁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은 우리의 마음을 흔들었다. 유가족들의 투쟁은 “그들이 상실한 것을 우리 모두가 상실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들의 투쟁을 보며 우리는 기존의 언어를 의심하고 침몰 해 버린 ’ 진리‘와 ’정의‘를 찾기 시작했다. 흔들린 우리는 더 이상 관객으로만 남아 있을 수가 없게 된다. <생일>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주체‘로서 ’진리‘라는 이름의 타자를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하자고, 그렇게 슬픔에 참여함으로써 진정한 의미에서의 ’우리‘가 되자고 관객을 초대한다.
영화가 치열한 투쟁의 장이 아닌 수호의 생일이라는 보다 일상적인 자리를 배경으로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더 이상 진실은 완전하게 통제되고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낡은 언어의 홍수 속에 파묻히는 방식으로 잊혀버린다. 이때 예술이 해야 하는 것은 진실이 무관심 속에 망각되지 않도록 “그 사건의 공간을 채우는 정서들을 여러 겹으로 만들어 그 겹겹이 쌓인 공간들, 정서의 미로들 속에서 더 많은 이들이 오래 놀고 헤매고 사유하게” 만드는 것이다. <생일>에서 수호의 생일날 많은 이들이 수호에 관한 시시콜콜한 추억을 나누고, 수호를 회상하는 이들의 표정을 드러내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이처럼 ‘세월호’라는 상실의 공간을 둘러싼 정서를 여러 겹으로 만들어 이 속에서 함께 놀고 헤매고 사유하자고 관객들을 초대하기 위함이다.
라깡의 관점에서 가짜 시간을 정지시키고 미래로 향하는 유일한 방법은 학습된 삶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다. 낡은 언어와 낡은 정의를 토대로 유지되는 낡은 질서로의 입장을 거부하고 방황하는 것만이 미래의 시간을 가져올 수 있다. <생일>은 때로는 울고 때로는 웃으며 지리멸렬하게 생존하여, 미래의 시간을 찾아 방황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오래도록 지속되기를 응원한다.
참고 자료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75쪽, 77쪽.
위의 책, 139쪽.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64쪽, 65쪽, 67쪽.
위의 책, 4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