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비평
본 글에는 영화 <생일>의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생일>의 엔딩은 죽음과 망각이 아닌, ‘끝없는 슬픔’이라는 새로운 삶의 형식으로 우리가 함께 투쟁할 때 미래의 시간과 진리가 도래할 것이라는 고집스러운 믿음을 드러낸다. ‘끝없는 슬픔’에 동참한다는 것은 효율성과 생산성으로 설명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항상 비주류로 밀려날 수밖에 없는 ‘가치’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치’와 ‘정의’라는 이름의 진리를 향한 끝없는, ‘적당히’ 끝낼 수 없는 여정에 함께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고집스러운 믿음을 바탕으로, 영화는 “의식의 거울이 제공하는 단순한 기록과 증언이 아니라, 아직 지배적 흐름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것들, 도래할 세력들에 대한 기록이며 증언”이 된다.
<생일>은 따뜻한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순남은 수호의 방을 닦고, 정일은 수호와의 추억이 담긴 낚싯대 앞에서 상념에 잠겨 있다. 예솔이 학교에서 돌아오고, 순남과 정일은 예솔과 웃으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카메라는 텅 빈 집을 비추고, 수호를 상징하는 센서등이 반짝인다. 혹시 일면 동화적이어 보일 수 있는 이러한 엔딩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현실의 아픔을 은폐하고 유대감을 강화하여 기존의 불평등한 사회 질서를 보수하는 것은 아닌가? 랑시에르는 이러한 활동이 ‘정치’가 아닌 ‘윤리’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생일>의 엔딩은 기존의 질서를 보수하고 유지하는 행위가 아니라 죽음 혹은 망각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이다. 낡은 언어의 홍수 속에 사람들은 점점 세월호 참사를 잊어 갔고 많은 언론은 더 이상 세월호 참사를 보도하지 않기 시작했다. 의혹을 제기하고 진실을 밝히려 했던 사람들이 고소 ․ 고발을 당하는 사태가 이어졌고 심지어는 구속되기도 했다. 누군가는 자살하고, 누군가는 일상으로 돌아갔다. “자살하거나 포기하거나. 권력은 그렇게 죽음과 망각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생일>의 엔딩 장면에서 순남과 정일은 여전히 수호를 그리워하며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전과 다르게 슬픔 안에서 ‘우리’가 되어 함께 슬퍼하고 있다. 영화는 권력이 쥐어준 죽음과 망각이라는 두 가지 선택지를 거부하고 새로운 선택지를 상상한다. 이는 세월호의 곁에서 함께 울고 웃고 이야기하고 사유하며 슬퍼하기를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함께 ‘슬퍼함’으로써 투쟁할 때 수호는 센서등의 반짝임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이때 존재를 드러내는 것은 수호의 모습을 한 ‘진리’이기도 한다. 영화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 지난한 싸움 뒤에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진리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믿음은 아무것도 믿지 않는 ‘허무주의’의 반대편에 있다. ‘허무주의’는 현실을 수용하고 이에 굴복하는 패배주의의 또 다른 형태이며,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정의를 찾는 여정을 시작할 수 없다. 다른 어딘가에 우리가 찾는 진리와 미래의 시간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진리를 찾아 떠날 수 있다. 또한 끝이 보이지 않는 이 지난한 싸움에 필요한 것은 “그 긴 싸움을 버텨 낼 수 있게 하고 또 싸움 이후를 행복하게 예감하게 하는, 새로운 삶의 형식을 발명해 내는 일”이다.
<생일>의 마지막 신에서는 인물을 보여주지 않고 텅 빈 집을 비춘다. 집은 수호를 잃음으로써 모든 것을 잃은 자리이다. 이 장소를 지탱하던 모든 언어와 질서와 진리가 무너졌고, 이곳에는 분노와 슬픔만이 가득 찼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너진 이 자리에서 역설적으로 새로운 진리를 찾기 위한 여정이 시작된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었던 공동체의 지형, 즉 우리 사회의 ‘토포스(Topos)’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 것. 낡은 언어와 정의가 주는 실질적인 이익을 거부하는 것. 그리하여 모호하고 추상적이며 영원한 타자인 ‘정의’라는 이름의 진리를 향해 스스로를 내던지는 것. 이것이 바로 ‘아토포스(Atopos)’이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토포스’가 무너져 내린, 정체가 모호한 공간에서 기존의 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삶의 방식과 새로운 공간성을 제안하며 익숙한 ‘토포스’를 떠나 방황하는 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 예술의 아토포스이다. 또 이렇게 작동하는 예술의 아토포스는 랑시에르가 ‘미학의 정치’라고 불렀던 것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는 신형철이 “내가 사랑하는 그 대상의 어떤 가능성에 대한 고집스러운 믿음“이라 정의했던 ‘사랑’이기도 하다. 이 사랑의 가장 중요한 성분은 “그 가능성의 마지막 1%까지도 현실화시키기 위해 끝까지 곁을 떠나지 않는 지구력”이다.
참고 자료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75쪽.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10쪽-11쪽.
위의 책, 257쪽.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51쪽.
위의 책, 45쪽.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319쪽.
백상현, 『속지 않는 자들이 방황한다』, 위고, 2017, 69쪽.
진은영, 『문학의 아토포스』, 그린비, 2014, 180쪽.
위의 책, 319쪽.
위의 책, 319쪽.